별비가 흐르던 날들(하)

by 이은호


'오라 북으로!' '뛰면 5분!'


북한군 GP(Guard Post, 비무장지대 내 감시초소) 옆 산등성이에 서있는 입간판에 새겨진 커다란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뛰면 5분? 실제로 내가 있는 우리 측 GP에서 계곡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적 GP와는 직선거리로 650미터에 불과하였다. 마치 손을 쭉 뻗으면 닿을 듯한 거리. 적 GP 내에서 이동하는 북한군 병사의 동작이 육안으로 식별될 정도로 가깝게 보였다. 그러나 지리적으로는 뛰면 5분인데, 실제로는 절대 닿을 수 없는 거리이기도 하였다. 가깝고도 먼 관계. 같은 생김새에 같은 언어를 사용하지만 서로 총을 겨누는 사이. 전쟁이 일어나면 죽고 죽여야 하는 관계였다. 그들이나 우리나 타의에 의해 젊은 나이에 낯선 곳으로 끌려와 서로 대치해야 하는 상대가 되고 말았다. 이런 걸 두고 악연이라고 하는 건지도.


내가 맡은 보직, 정보상황병은 적의 동태를 살피는 일이다. 직접 살피는 것은 아니고 여러 경로를 통해 정보를 입수하여 일상정보는 일단위, 긴급정보는 즉시 보고를 원칙으로 한다. 그 정보입수 채널 중 아군 GP 관측병이 입수하는 관측정보가 있다. 북측 몇 번 도로에 뭐가 지나가고, 마을에서 무슨 행사가 있고, 대규모 병력이동이나 전차나 방사포 등 중화기도 등장한다. GP 관측병의 이러한 보고를 사단사령부 지하벙커에 있는 내가 이해하기 위해서는 북측 지형과 마을 도로 등의 풍경을 내 머릿속에 그릴 수 있어야 했다. 그것도 관측이 올라오는 GP가 여러 곳이라 각각 다른 그림을 머릿속에 넣어 두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의 보고 내용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마치 장님 코끼리 다리 만지듯 상황을 오판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정보상황병에게 있어서 현장답사는 필수였다.


정보참모부 내에 대북 심리전을 맡은 심리전 장교가 있었다. 그리고 여군 세 명이 배속되어 있었다. 중사 한 명에 하사 두 명. 주 임무는 우리 측 확성기를 통한 대북방송이었다. 그래서 자주 GP에 들어갔다. 그 기회를 이용하여 나도 한 번씩 동행하여 GP에 들어가 적 지역을 눈에 익히는 기회를 가졌다. 계절이 바뀔 때 또는 북지역에 공사를 하여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거나 할 때 찾았다. 비무장지대 내 높은 고지에 구축되어 있는 GP를 방문할 때면 무거운 긴장감이 흘렀다. 모든 군인이 방탄조끼를 입고, 소총 잠금장치를 풀어 즉각 사격이 가능한 상태로 차에 올랐다. M60 기관총을 거치한 지프차가 앞서고, GP 근무자가 먹을 부식을 실은 트럭이 그 뒤를 따랐다. 철책 통문을 열고 비무장지대로 들어서 보급로를 따라 달렸다. 보급로에서 절대 벗어나면 안 되었다. 사방에 지뢰밭이 있기 때문이었다. 파란 하늘, 흰구름, 새 울음소리, 푸르른 숲과 나무가 너무도 평화로운 풍경을 그렸지만, 그곳은 여전히 전쟁터였다.



북한 인민군 여러분, 오늘 하루도 잘 보내고 계십니까? 이렇게 날씨 좋고 평화로운 날, 고향에 두고 온 부모님이 그립지 않으신지요. 울며 헤어져야 했던 여자친구가 보고 싶지 않으신지요.


젊고 낭랑한 여자 목소리가 북측을 향해 열려있는 확성기를 통하여 퍼져나갔다. 심리전의 주목적은 북한군의 마음을 흔들어 전의를 꺾어놓는 것이다. 북한군의 복무기간은 10년. 그에 반하여 우리 군은 2년 반(그 당시). 그것도 1년 전방경계근무를 마치면 후속부대와 교체되어 후방으로 빠지고 휴가를 갔다. 물론 정기휴가는 따로 있다. 하지만 북한군은 휴가 자체가 없다. 자기네들은 10년간 말뚝근무를 서는데, 상대방은 매년 바뀌는 셈이다. 그런 북한사회의 모순을 파고들어 심적 동요를 일으키게 하는 것이다. 실제로 내가 군복무 중 휴전선 인근의 북한군 병사가 우리 대북방송을 듣고 탈북을 한 경우가 차례 있었다.


우리 GP와 적 GP 근무자 간에 확성기를 통한 대화도 이루어졌다. 시나리오는 심리전팀에서 짜주었다. 그때 북측에서 하는 최고의 자랑이 '이밥에 고깃국'이다. '우리는 경애하는 김일성 수령동지의 은혜로 이밥에 고깃국을 배부르게 먹었다.'고 자랑했다. 휴가도 없고, 가족 면회도 없고, 여친은 진즉에 고무신 거꾸로 신고. 10년을 붙박이 근무를 서며, 자랑할 게 하나도 없는 그들이 쌀밥에 돼지고기 국 먹은 걸 최고의 자랑으로 여겼다. 그러한 대화 내용은 고스란히 정리되어 나에게 보고되었다. 내용을 읽으며 한편으로는 북한군 병사들에 대한 연민의 감정을, 다른 한편으로는 그나마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게 다행이라는 안도의 감정을 느꼈다.


매일 아침 일과가 시작되면 사단장님이 지하벙커에서 일직사령으로부터 상황보고를 받았다. 전날 밤 사단 작전지역 내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보고받는 것이다. 그걸 준비하는 게 상황병의 또 다른 임무 중 하나였다. 그나마 사단사령부에 근무하는 참모나 보좌관은 나았지만, 직할대에 근무하는 영관급 장교들은 상황보고를 힘들어하였다. 어떤 분은 10분 보고를 위하여 거진 한 시간 정도 시간을 할애하여 연습 또 연습하였다. 그럴 때면 정보상황병과 작전상황병이 적극 도와드렸다. 상황판에 적힌 내용 중 중요사항에 대하여 상세하게 설명드리고, 사단장님의 예상질문까지 만들어 드렸다. 하루의 첫 시작인 상황보고가 무사히 끝난다는 것은 일직사령뿐만 아니라 상황병에게도 매우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에 최선을 다하는 게 당연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상황병으로서 어느 정도 짬밥이 차야만 가능한 일이기도 하였다.


보고 사항 중 우리 GP와 적 GP 간 대화 내용도 있었다. 지금은 북한을 자극한다는 이유로 대북 작전이 거의 중단되었지만, 그때에는 대북 심리전이 상당히 중요한 전술로 사용되었다. 상황판에는 대화 내용을 요약하여 핵심만 적는데, 이게 운용의 묘를 요하는 일이었다. 실제와 상관없이 마지막엔 우리 측이 멋지게 한방 먹이는 걸로 끝나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약간의 각색과 소설적 묘미가 가미되곤 하였다. 어쩌면 그때 갈고닦았던 기교가 지금 글쓰기를 하는데 바탕이 되는지도 모르겠다.



상황병 생활을 하며 맞이한 두 번째 겨울. 본격적인 겨울이 시작되는 겨울 초입의 어느 날이었다. 역시 심리전 장교를 따라 전방 GP를 방문하였다. 그날은 GP 두 곳에서 심리전 방송을 한다고 시간이 지체되었다. 해가 떨어지고 주위가 어둑해지고 있었다. 별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는데, 우리가 지나온 뒤쪽에서 뭔가 범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그리고 이어지는 매캐한 냄새. 차가 높은 지대에 이르렀을 때, 장교님이 차를 멈추게 하였다. 일행 모두 차에서 내렸다. 우리가 왔던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눈이 화끈하였다. , 불이었다. 비무장지대 안에서 타오른 불길이 붉은 혀를 날름거리며 바람을 타고 퍼지며 북쪽으로 전진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펑' '펑' 하는 소리. 지뢰였다. 타오르는 불길, 하늘로 치솟는 연기에 맞춰 지뢰가 축하라도 하듯 폭죽을 터뜨리고 있었다.


'화공작전'


화공작전은 매년 벌어지는 연례행사였다. 북서풍이 본격적으로 몰아치는 한겨울이 오기 전, 남서풍이나 동남풍이 부는 날을 기해 비무장지대에 불을 놓는 것이다. 이때를 놓치면 북서풍이 불 때 북측에서 화공작전을 벌여 우리가 큰 피해를 입는다. 화공작전의 목적은 시계확보. 여름을 지나며 무성해진 수풀을 태워 적이 근접할 때 은폐할 곳을 제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철책선을 지키는 초병에게는 생사가 걸린 중요한 작전이었다. '펑' '펑' '펑'. 한국전쟁 때 그리고 휴전 후 얼마나 많은 지뢰를 비무장지대에 쏟아부었는지, 매년 불을 놓아 태움에도 매년 수백 수천발의 지뢰가 터진다고 했다. 남한과 북한의 허리를 잘라 놓은 4킬로의 공간. 온갖 생명이 생동하는 곳이지만, 군인에게는 조금도 긴장의 끈을 늦출 수 없는 전운이 감도는 곳이기도 하였다.


까맣고 맑은 하늘에선 별비가 흐르고, 그 별빛이 닿는 땅에서는 붉은 불길이 타오르고. 차가움과 뜨거움이 교차하는 공간은 희뿌연 연기로 서로의 온도와 색깔을 중화시키고 있었다. 차가움과 뜨거움, 검정과 빨강 그리고 회색. 거기에 덧붙여진 폭죽까지. 현실은 냉엄하였지만 눈에 보이는 풍경은 경이로웠다. 한참을 보고 있노라니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제 그만 가자는 장교님의 명령으로 다시 차에 올랐다. 그러나 부대로 복귀하는 내내 그 광경이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청춘의 한 자락. 마음은 붉게 타오르지만 꾹꾹 참고 인내해야 하는 군이라는 특수한 공간. 어쩌면 비무장지대에서 펼쳐진 화공작전을 목격하면서 약간의 위로를 받았는지도 몰랐다. 내 마음의 찌꺼기를 그 불길에 던져 함께 태워버렸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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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전역 후, 작전참모부 소속의 작전상황병이 휴가를 나와 나를 찾아온 적이 있다. 소속은 달랐지만 같은 시간대에 지하벙커에서 근무하며 친하게 지내던 사이였다. 그 친구 말이 내 후임으로 들어온 정보상황병 둘 다 상황근무를 잘못 서 영창에 갔다고 하였다. 그 말을 듣고 '아이고, 쯧쯧.' 탄식이 절로 나왔다. 아까운 청춘들이 하지 말아야 할 고생을 하는구나 싶었다.


정보상황병 말뚝근무를 서면서 선임하사께 후임을 빨리 뽑아달라고 몇 번이나 요청드렸다. 배워야 할 것도 많고, 함께 근무서면서 실제 상황을 경험해야 할 게 많아 육성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린다고 설명드렸다. 하지만 선임하사님은 느긋하였다. 늘 돌아오는 대답이 '마땅한 신입 훈련병이 없네.'였다. 내가 상황근무를 잘 보고 있으니, 쉽게 생각했는지도 몰랐다. 그러고서는 결국 내 전역일이 한 달도 채 남지 않은 시점에서 후임 한 명을 뽑아주었다. 덕분에 나는 제대하기 사흘 전, 사단 전역자교육 들어가기 전날까지 근무를 섰다. 남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은 만큼 최선을 다하여 후임을 가르쳤다. 그러나 역시 역부족이었는지도 몰랐다. 그리고 내가 전역하고 나서야 나머지 한 명의 정보상황병이 보충되었다고 했다.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 상황병 수준으로만 보면 초등학교 갓 입학한 1학년 짜리와 어린이집에 막 들어간 철부지 둘이 상황근무를 서는 꼴이라고나 할까. 그러니 탈이 날 수밖에. 탈이 안 나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군대에서 간부들이 사병들의 역할과 능력을 간과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은 사병근무를 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고참에서 신참으로, 선임에서 후임으로 이어지는 역할의 인수인계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단지 머릿수만 채우면 조직이 돌아간다고 생각했다. 정보참모부 내 직속 과장과 선임하사도 마찬가지였다. 정보상황병의 역할과 책임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들은 몰랐다. 그냥 가만히 앉아있으면 정보가 저절로 들어오고, 긴급 상황이 즉시즉시 보고되는 줄 알고 있는 듯했다. 상황병들이 근무를 서며 얼마나 오랫동안 관련 부대의 근무자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데 공을 들이는지 몰랐다. 실제로 그런 관계가 형성되지 않고는 절대로 정보가 제때에 흐르지 않는다. 사단의 정보상황병만 모르는 상태에서 긴박한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일이 터지면 상황병은 영창 예약이다. 사안의 중요도 그리고 그때의 정보참모님 기분에 따라 영창을 가느냐 아니면 얼차려로 끝나느냐가 결정된다. 아마도 내 후임병들의 경우는 그와 비슷한 상황에서 재수 없게도 영창으로 결정되지 않았나 싶다. 결과적으로 내 직속 과장과 선임하사의 안일한 생각으로 후임을 늦게 선발하고, 상황병으로서 제대로 교육받을 시간을 확보해 주지 않음으로써, 아까운 젊은이들에게 군대 영창이라는 지워지지 않을 상처를 준 셈이다.


찬란하게 피어나야 할 청춘의 시기에, 군대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갈등과 번민과 그리움에 힘들었던 날들. 그리고 한편으로는 인내심과 책임감을 기르고 온전한 성년으로 성장하는 기회를 갖기도 했던 곳.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그 시절 밤하늘에 흐르던 별비를 보며 마음 촉촉이 젖던 기억이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