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은 산 깊은 골 적막한 산하 눈 내린 전선을 우리는 간다
걷고 또 걸었다. 군가를 부르며. 최전방으로 이어지는 도로 양옆으로 완전군장을 한 전우들의 행렬이 길게 늘어졌다. 그리고 나는 그중 한 명이었다. '전투력은 훈련에서 나온다.'는 사단장님의 준엄한 지시 하에 행정병도 열외 없이 전원 동계훈련에 참석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오히려 나는 그 명령이 반가웠다. 비록 8시간을 걸어서 휴전선까지 가서 4시간 경계근무를 서고, 다시 8시간을 걸어서 부대로 복귀하는 무박 2일의 고된 훈련이었지만, 나는 기꺼운 마음으로 군장을 꾸렸다. 방독면을 옆에 차고, K1 소총에 20킬로 군장을 멨다. 오랜만에 나서는 훈련에, '그래, 이게 군인이지.' 하는 마음에 뿌듯하였다.
서부전선 최전방 사단의 사단사령부 내 지하벙커가 내 근무지였다. 소속은 정보참모부, 보직은 정보상황병. 내 주 임무는 우리 사단의 휴전선 북쪽 북한군 동태를 감시하는 것이었는데, 정보 수집 채널이 다양하였다. 비무장지대 내 아군 GP의 관측병이 수집하는 적 및 북측 마을의 움직임, GOP에 위치해 있는 감시장비에 포착되는 적의 움직임, 북측에서 파내려 오는 땅굴을 탐지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청음소대에서 탐지하는 정보 등. 그 외에도 정보부대, 보안부대, JSA 상황실 등 정보를 확인하고 긴밀한 연락을 주고받아야 하는 상대들이 있었다. 그나마 평일 낮 근무시간 중에는 각 행정부처로 연락이 오지만, 평일 일과 후나 휴일에는 모든 상황의 중심이 상황실이었다. 그리고 그 접점은 바로 상황병. 내가 근무했던 지하벙커의 책상 위에는 거진 열 대 정도의 전화기가 놓여 있었고, 어떤 때는 서너 대의 전화가 동시에 울리기도 하였다. 영창 대기조. 자칫 잘못하면 영창 간다며, 상황병의 위치가 그렇다고 하였다. 신속 정확한 판단과 보고. 그게 상황병 근무의 핵심이었다. 따라서 상황실 근무를 할 때는 긴장의 끈을 늦출 수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본의 아니게 혼자서 오랫동안 상황실 말뚝근무를 서야 했다.
돌이켜보면 내 인생은 일에 파묻힌 나날이었다. 딱히 내가 일을 좋아하는 것도 아닌데, 일이 나를 따랐다. 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논산훈련소에서도 훈련병 신분으로 조교 내부반에서 차트를 그리고 교보재에 글자를 새겼다. 보충대를 거쳐 사단 신병교육대에 가서도 마찬가지였다. 논산훈련소 출신은 군기가 빠졌다며 자대에 배치받기 전 2주간 추가 훈련을 받았는데, 그때도 행정반에서 뭔가를 적거나 그렸다. 그때마다 훈련이나 점호에서 열외 되는 특혜를 누리기도 하고, 간식을 얻어먹기도 하였다. 신병교육대에서 수료식이 있는 날, 열외 해도 좋다는 행정반 선임하사의 허락을 받았음에도 굳이 수료식에 참석하여 벽돌격파를 한다고 손날에 시퍼렇게 멍이 들기도 하였다. 벽돌을 못 깨면 추가 훈련을 받아야 한다는 바람에 있는 힘껏 내리쳤던 것이다. 덕분에 한 번에 격파하여 무사히 통과하였다. 그러고 보면 주어진 상황에서 그것을 피하지 않고 맞서 헤쳐나가려는 최소한의 노력은 했던 것 같다.
자대에 배치받고 시작된 상황병 생활. 처음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전화받는 것도 힘들고, 상황파악은 물론 일상정보와 긴급정보를 구분하여 보고하는 것도 힘들고, 아크릴로 된 상황판에 색연필로 글씨 쓰는 것도 힘들고, 모든 게 다 힘들었다. 하지만 군에서는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바로 위 사수를 정말 잘 만난 것. 막 병장을 단 사수가 인내심을 갖고 세세하게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두 달 후부터는 단독 근무를 설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그렇게 본격적인 상황병 생활이 시작되었다. 사수가 제대하고 상병도 채 달지 못한 일병이 조수를 받았다. 조수는 H대 미술학도였다. 생긴 건 산적같이 생긴 게 마음이 여렸다. 내가 보기에 상황병 체질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선임하사님이 데려온 조수를 내가 마다할 상황도 아니어서, 내가 사수에게 배운 것 이상으로 정성 들여 조수를 가르쳤다. 그렇게 공을 들여 겨우 제 앞가림할 정도가 되었고, 나도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그 정도로 잘 적응하고 지냈으면 좋으련만 좋지 않은 일이 생기고 말았다. 어느 날인가 조수가 풀이 팍 죽어있는 게 눈에 띄었다. 며칠이 지나도 마찬가지였다. 그 모습이 걱정스러워 무슨 일인지 물으니 한참 뜸 들이고 나서 털어놓았다. 여자친구가 고무신을 거꾸로 신었다는 것이다. 군바리에게 있어서 여친의 배신은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과 같다. 조수가 그런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듣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다음날 선임하사께 조수의 특별휴가를 요청드렸다. 그렇게 하여 일주일의 휴가증을 조수에게 건넸다. '인생은 길고 세상에 여자는 많다.'며 혹시라도 여친과 관계개선이 되지 않더라도 낙심하지 말고 마음 굳게 먹으라고 당부까지 곁들였다. 하지만 제삼자의 충고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는지 아니면 더 깊은 다른 사연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조수가 휴가기간이 끝나고도 부대에 복귀하지 않았다.
휴가미귀.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 일어났다. '짜식, 기껏 가르치고 자기 사정 생각해서 특별휴가까지 보내주었는데 사고를 쳐?' 조수가 원망스러웠다. 조수는 사흘 뒤 스스로 복귀하였다. 그리고 사단 영창에서 15일을 살았다. 핼쑥해진 얼굴로 돌아온 그에게 어떻게 지냈는지 물으니, 밥 먹고 잠자는 시간 외에는 감옥 창살에 매달려 있었다고 했다. 조교가 '창살의 매미, 실시!' 하면 창살에 매달려 '맴 맴 맴 맴' 하며 하루 종일 울었다고 했다. 그 울음과 함께 여친에 대한 감정이 정리되었을까, 기분이 한결 홀가분해졌다고 하였다. 그럼에도 조수는 더 이상 사단사령부에서 근무할 수는 없었다. 최전방으로 전보되어 GP, GOP에 있는 대북 선전물의 도색 작업에 투입되었다. 전화기 대신 붓과 페인트통을 들었으니, 나름 전공을 살린 셈이라고 할까. 그렇게 조수가 떠나 버리고 나는 혼자 남아 상황실 말뚝근무를 해야 했다. 그러던 중 행정병 열외 없이 훈련을 받으라는 명령이 떨어져 상황실을 탈출하게 된 것이다.
최전방 철책선까지 완전군장 하고 8시간 행군하는 것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특히 한번 쉬었다가 다시 걸음을 뗄 때에는 한참을 제대로 걸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육체적으로는 힘들지 몰라도, 정신적으로는 너무나 좋았다. 겨울의 매서운 바람이 오히려 시원하게 느껴졌고, 눈에 들어오는 주변의 삭막한 겨울풍경도 정겹게 다가왔다. 도저히 도달할 것 같지 않던 목표지에 도착한 것은 이미 날이 어두워진 뒤였다. 철책선 인근의 독립 중대. 그곳에 근무하는 병사들은 밤이나 낮이나 철책을 지키는 게 임무였다. 초소 근무에 순찰 그리고 비무장지대 안으로 들어가 수색과 매복을 하고. 스무 살 꽃 같은 나이에 군에 입대하여 세상과 단절된 곳에서 버텨야 하는 시간. 게다가 위험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는 최전방이 아닌가. 물론 나도 그들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신세였지만.
부대 막사에서 군장을 풀고 정비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전투식량으로 늦은 저녁식사를 하였다. 바짝 마른밥이 들어있는 봉투에 뜨거운 물 붓고 입구를 봉하고, 불과 10분 만에 김이 모락모락 나고 포실한 쇠고기 볶음밥이 완성되었다. 허기졌던 속이 채워지자 그제야 살 것 같았다. 함께 제공된 무슨 맛인지 모를 바짝 마른 비스킷을 씹고 있는데, 집합명령이 떨어졌다. 그곳 부대의 중대장님으로부터 훈련계획과 주의사항을 듣고, 한 보따리의 방한장구를 지급받았다. 영하 20°까지 떨어지는 한밤중에 초병근무를 서야 하는데, 우리가 입고 간 복장으로는 턱도 없었다. 모두들 속옷, 내복, 전투복, 야전점퍼, 방한바지에 방한외투를 껴입고, 양말을 세 켤레나 겹쳐 신고 그 위에 방한부츠를 신었다. 손에는 동장갑 위에 벙어리장갑 형태의 커다란 방한장갑을 착용하였다. 목에는 두꺼운 머플러를 두르고 귀마개에 방한모를 썼다. 그러고 나자 모두들 몸집이 두배로 커졌는데, 그 모습이 뒤뚱뒤뚱 마치 오뚝이 같았다. 우스갯소리로 그 복장으로 눈 위에 넘어지면 자기 스스로는 일어나지 못한다고 하였다. 또 눈앞에 적이 나타나면 총 한 발 쏘지 못하고 죽는다고 하였다. 총을 쏘려면 벙어리 방한장갑 벗고, 동장갑 벗고, 소총 잠금장치를 풀어야 하는데, 어느 세월에 하느냐는 것이다.
복장을 갖추고 연병장에 집합하자 실탄이 지급되었다. 개인별 수류탄 두발과 실탄 30발이 장착된 탄창 두 개. 탄창 하나를 소총에 장착하고 잠금장치의 '잠금' 상태를 확인하였다. 중대장님으로부터 주의사항을 한번 더 들은 후, 오뚝이들이 어둠을 뚫고 뒤뚱거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날씨는 추웠지만 잔뜩 껴입은 옷에 몸이 후끈해져 땀이 났고, 허연 입김이 뿜어져 나왔다. 30여분 후 드디어 철책에 도착하였다. 능선을 따라 3.5m 높이의 철책이 오르락내리락하였고, 그 높낮이에 맞춰 계단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뒤뚱뒤뚱 계단을 올랐다. 커진 부피만큼 늘어난 중량에 숨이 더 가빴다. 함께 나선 그곳 병사가 우리의 굼뜬 모습을 보고서는, 자기네들은 오르락내리락 계단을 날아다닌다고 자랑하였다. 날아다닌다고? 순간 날개 달린 뚱뚱한 오뚝이들이 줄줄이 나는 모습이 떠올라 웃음이 났다.
눈앞에 나타나는 초소마다 그곳 병사 한 명에 우리 부대원 두 명이 배치되었다. 난 재수 없게 거의 1킬로쯤 걸은 후 거의 마지막 무렵 한 초소에 배치되었다. 그리고 거기서 네 시간을 눈을 부릅뜨고 전방을 주시해야 했다. 캄캄한 밤. 사방은 쥐 죽은 듯 고요... 하지 않았다. 사방을 왕왕거리며 울리는 남측과 북측의 확성기 소리. 우리 측 확성기에서는 한참 유행하는 가요가 흘러나오고, 북측에서는 김일성 수령동지의 업적을 찬양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육성이 흘러나왔다. 두 소리가 공중에서 뒤섞여 무슨 소린지 영 알아들을 수 없었다. '우왕~ 우왕~' 하는 소음에 불과하였다. 알아들을 수도 없는 방송을 도대체 뭐 하러, 누구 들으라고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서로 알아듣지 못하도록 방해방송 하는 건지도 몰랐다. 아니면 초병들이 깜빡 졸까 봐 잠 못 들게 하는 건지도.
시간이 지나고 어느 순간 확성기 소음이 딱 그쳤다. 그리고 찾아온 적막. 귀에서 웅웅 거리는 잔향이 한동안 이어졌지만 그것도 사라지고, 추운 겨울 메마른 나뭇가지를 흔드는 바람소리만 남았다. 휭- 휭-. 철책 너머 숲 속의 나무들이 잎과 살을 떼어낸 뼈다귀 같은 가지들을 하늘을 향해 흔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위로는 차갑게 열린 까만 밤하늘과 무수히 많은 별이 있었다. 별빛이 숲으로 떨어졌다. 별빛은 직선으로 떨어지지 않고, 차가운 공기를 통과하며 휘어지고 부서져 미세한 먼지처럼 흩어졌다. 그 빛이 가지 표면에 내려앉아 은빛 선을 그렸고, 그 아래로는 더욱 짙은 그림자가 만들어졌다. 바람이 불며 가지가 흔들리자, 마치 나무가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다. 뚜벅뚜벅 걸어서 철책을 넘어올 것 같았다.
함께 근무 서는 병사가 착시라고 하였다. 특히 풀과 나뭇잎이 무성한 여름날 밤에 한참 노려보고 있으면 숲에서 온갖 것들이 나타난다고 하였다. 풀무더기가 북한군이 되어서 기어 오기도 하고, 나무가 기괴한 괴물이 되어 달려들기도 한다고 하였다. 그럴 땐 눈을 풀어 하늘을 보라고 하였다.
고개를 들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시린 눈에 반짝반짝 빛나는 별들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로 떠오르는 얼굴들이 있었다. 가족, 친구 그리고 사랑하는 여친. 나를 보고 웃고 있었다. 나를 살게 하는 이유, 내가 힘든 시간을 견뎌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휴전선 너머 비무장지대 하늘에서 별비가 흐르던 밤. 청춘의 고달팠던 하루가 함께 흐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