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은호 Aug 01. 2022

추억을 그리며 라디오를 듣다



"폭풍이 지나간 들판에도 꽃은 피고 지진에 무너진 땅에도 맑은 샘은 솟아나는 것..."


정확하게 기억하는지는 모르겠는데 초등학교 시절 라디오에서 듣던 '절망은 없다'라는 프로그램에서 여성 성우가 담담한 목소리로 들려주던 내레이션이다.


갖은 병마로.. 가난으로.. 가정불화로.. 남편의 폭력으로.. 가족의 죽음으로.. 사건사고로.. 사업실패로...


절망의 끝을 달리던 사람들이 그 인생의 마지막 자락을 부여잡고 어떻게 극복해 나가는지 기구한 사연을 드라마 형식으그려내었고 끝 부분엔 실제 사연자가 출연하여 그 사실감을 배가 시켰다.


당시는 TV가 대단히 귀해서 부잣집에나 겨우 한 대씩 있을 정도였고 대다수 서민들의 가정에서는 온 가족이 모여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던 시절이어서.. '절망은 없다'는 서민들의 굴곡진 삶과 애환을 절절하게 담아내어 높은 인기를 누렸다.


많은 서민들이 그러했듯이 우리 집 역시 형편이 썩 좋지 못하였고 가난에 시달리던 시기였으므로.. 방송을 들으며 어린 마음에도 '희망을 잃지 않고 꿋꿋하게 살다 보면 우리 집에도 좋은 날이 오겠지..' 하는 막연한 기대를 품었었다.



또 하나 기억에 남는 방송은 어린이 방송인데.. '마룻!' '아랏!' 하고 기합을 넣으며 나쁜 놈들을 무찌르던 '마루치 아라치'라는 어린이 연속극이다.


훗날에야 TV의 만화영화로 많은 영웅 캐릭터들이 등장하여 어린이 시청자들을 사로잡았지만.. 당시 라디오는 또 특유의 힘이 있어서 듣는 것만으로도 머릿속에 무한한 상상의 날개를 펼치게 해 주었다.


'우하하하! 나는 파란 해골 13호다!'라는 나쁜 놈의 외침에 '파란 해골은 도대체 얼마나 못되게 생겼을까?' 상상하며 도화지에 모습을 그려보기도 했었다.



다음으로 라디오 방송에 몰두했던 시절은 질풍노도의 고등학교 시절이었다.


시험 때 친구 집에서 공부한다고 밤샘하면서 '별이 빛나는 밤에'를 들으며 장단에 맞춰 책상을 두드리거나 어깨를 으쓱으쓱하던 그리운 시절...


'Crazy Love' 'Sea of Heartbreak' 'You Mean Everything to Me' 등을 흥얼흥얼 따라 부르기도 하고.. 'Hotel California' 'Stairway to Heaven' 등 주옥같은 곡을 감상하기도 하였다. 고요한 심야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기타 선율이 얼마나 절절하게 가슴을 적셔오던지...



청년은 희망을 품으며 살고 나이가 들면 추억을 그리워하며 산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나도 어느새 추억을 들출 나이가 되어버린 것 같다.


"왕년에 내가..." 하면 꼰대 소리를 듣는다지만 어쩔 수 없다. 희망보다는 추억을 그리는 나이가 되어버리고 만 것을...


며칠 전 조그만 소형 라디오 하나를 장만했다. 물론 폰에서도 앱을 깔아 라디오 방송을 들을 수 있지만 영 기분이 나지 않는다. 라디오는 라디오다워야지.


일부러 FM AM 방송 외에는 MP3나 다른 부가기능이 없는 기본형을 택했다.  그것도 다이얼을 돌려 주파수를 맞추는 아날로그 방식의 까만색 라디오이다. 다행히 스피커 성능도 좋고 이어폰을 끼고 들으니 음질도 깨끗하다. 블루투스 기능이 없어 긴 줄의 이어폰을 사용해야 한다. 완전히 아재 갬성이다. 그걸로 만족이다.


이걸 들고 등산을 다닐 거라고 하니 얼마 전 출산을 해서 몸조리 차 손자와 함께 집에 와 있는 딸이 웃으며 한마디 한다.


"아빠, 산에서 라디오를 듣는 것까지는 못 말리겠는데 뽕짝은 틀지 마세요."


'? 트로트가 어때서!'라는 반발심이 끌어올랐으나 픽 웃으며 넘겼다. 내 경우도 산에서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다니는 사람을 마주치면 그다지 좋지 못한 인상을 받았던 게 사실이다. 그것도 클래식이나 최소한 서정적인 노래도 아니고 행락철 관광버스에서나 어울릴법한 빠른 2박자의 쿵짝쿵짝은 아직까지는 아니다.



TV 방송 중에 '동물의 왕국'이나 '가요무대'를 즐겨보면 어쩔 수 없이 나이 든 걸 인정해야 하는 때가 된 것이라고 한다.


가끔 채널을 돌리다가 거기서 멈춰있는 나를 발견하고 황급히 채널을 넘기기도 하지만, 아직까지는 '동물의 왕국'보다는 'TV 동물농장', '가요무대'보다는 '싱어게인'즐겨보는 나이다. 적어도...



라디오를 장만한 뒤부터 가끔씩 방 안에서 라디오를 듣는다. 옛날 그때의 감성에는 못 미치지만 눈을 감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왠지 마음이 편안해진다.







매거진의 이전글 깨진 유리창 법칙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