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은호 Aug 19. 2022

동병상련



얼마 전 부부동반으로 옛 지인 부부를 만났다.

전에 살던 아파트에서 이웃으로 살았던 사이데 각기 다른 아파트로 이사해 헤어졌이후 어떻게 사는지 궁금할 때 한 번씩 만나는 분들다.


이번에는 집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한적한 교외의 식당에서 오리불고기에 막걸리 한잔씩을 걸치며 요즘같이 어수선한 시기를  버티고 있다며 서로 위로도 하고 한마음이 되어 세상 돌아가는 꼬락서니를 탓하기도 하였다.


식사를 마치고는 조용한 산책로도 걷고 황토길을 맨발로 1km 남짓 걸으며 모처럼 발바닥에 따끔한 자극도 주었다.


그분들과 우리 내외는 나이도 비슷하고 남자들 이제 현직에서 물러나 생활하는 패턴이 비슷하다 보니까 서로 살아가는 이야기에 공감이 많이 갔다.


특히 30년 넘게 바쁘게 직장생활을 한다고 밖으로만 나돌다가 이제는 아내와 함께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다 보니 서로 부딪히는 사소한 시빗거리나 미묘한 신경전이 어찌나 서로 닮았던지.. 참 사람 사는 모습은 거기서 거기구나 싶었다.


라면 끓이는 것 외에는 변변한 요리 하나 할 줄 아는 게 없고.. 설거지며 집안 청소며 세탁이며 화분에 물 주기 멍멍이 밥 주기 모기 잡기 쓰레기 분리수거하기 삼시세끼 뭐 먹을지 같이 걱정하기 등등...


마치 신입사원 시절로 돌아가 깐깐한 데다가 히스테리(?)까지 약간 있는 만만찮은 선임한테 업무의 ABC를 배우는 중이랄까...

그래도 신입사원 시절에는 군기라도 들었지만 이 나이엔 그럴 기력마저 없으니 아내의 타박이 오죽하겠는가..?!


그 사장님 왈..

"요즘 집에 있다 보니 아내의 성화에 사는 게 정말 힘듭니다. '설거지 좀 해주세요'라고 해서 설거지하고 있으면.. '화분에 물 좀 주세요' 또 화분에 물 주고 있으면.. '이것 좀 해주세요' '저것 좀 해주세요'.. 시킨 일이 끝나기도 전에 계속해서 지시가 떨어져 나중엔 뒤죽박죽이 되어서 정신이 하나도 없습디다."


그래도 얼마간백수 선배로 경험치가 2레벨쯤 있는 내가 빙긋 웃으며 조언을 하였다.

"집에서 살아남으려면 아내가 시키기 전에 웬만한 것들은 미리미리 알아서 해야 합니다. 경륜이 쌓이면 다 해결됩니다. 하하~"




그분이나 나나 오랫동안 회사에서 관리직으로 근무하면서 수십 명의 부하직원들을 두었던 베테랑들이다.

'왕년에 내말이지~!' 하며 이야기보따리를 늘어놓으면 몇 날 며칠은 버틸 정도의 경험과 능력이 있단 말이다.


관리직으로 오래 근무하면서 다양한 업무를 경험하다 보면 사람마다 일을 처리하는 루틴이 생기게 된다.

업무를 분류하여 우선순위를 정하고 시간계획을 세우고 실행하고 리뷰하고.. 특히 정해진 시간 안에 맡은 업무를 완료해야 하기 때문에 경력이 쌓일수록 계획을 꼼꼼하게 세우는 일에 공을 들이기 마련이다.


비록 현직에서는 물러났지만 오랜 세월 이런 패턴이 몸에 밴 사람에게 갑작스러운 아내의 지시는 정신적인 장애물이다.

다시 아내의 지시를 포함해서 새로 계획을 짜야하는데.. 아내의 지시가 계속 떨어진다면 뒤죽박죽이 될 수밖에 없다.


아내는 생각하기도 전에 움직일 수 있지만.. 남편은 계획을 세우기 전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아내는 한 번에 두 가지 일을 할 수 있지만.. '멸치볶음 만들면서 고등어 찜하기' 또는 '전화 통화하면서 TV 연속극 보기' 등등.

그러나 남편은 한 번에 한 가지밖에 못한다.

멸치볶음 다 만들고 나서야 냉동실에서 꽁꽁 언 고등어 꺼낸다.

전화 통화하면서 TV 연속극 보면 무슨 내용인지 1도 모른다. 당연히 누구랑 무슨 통화를 했는지도 가물가물...


그러므로 남편에게도 다 계획이 있으니 아내는 제발 여유를 두고 기다려 줄줄 알아야 한다.



그 사장님이나 나나 똑같이 느끼는 또 하나의 고충은 아내의 질문이나 지시'?' '.'가 떨어지기 전에 대답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참 고역이다.

남자는 생각해보고 나서 말을 해야 하는데 아내는 번개 같은 속도의 대답을 원한다.

그러다 때를 놓치면.. '반응이 없다' '나를 무시하냐?' 화를 낸다.


남자들이 사회생활을 직장생활을 하면서 어떻게 배웠던가..?

어찌 됐든 굳건하게 입을 꾹 다물고 버티는 게 살아남는 길 아니었던가 말이다.

하고 싶은 말이 굴뚝같아도 다시 한번 생각하고 되뇌어 말을 하지 않아야 했다. 마치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가지 않듯이...

회의석상에서 괜히 건설적인 말이랍시고 한마디 꺼냈다가.. '어.. 그럼 네가 해봐~!'하고 얼마나 많은 일들을 덤터기 썼던가 말이다.


아내는 생각하기도 전에 말할 수 있지만.. 남편의 머릿속 논리회로로는 생각하지 않으면 단 한마디도 입을 뗄 수가 없다.

요즘은 펜티엄급이라지만 우리 386급으로는 더 더딜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남편에게도 다 생각이 있으니 아내는 제발 좀 느긋하게 기다려 줄줄 알아야 한다.




그 사장님이 말씀하셨다.

"제 친구 중에 롤모델이 있는데.. 그 친구는 집에서 꼼짝도 안 합니다. 마실물도 와이프가 갖다 주고요 같이 등산 갔던 친구들 모두 데리고 집에 가면 먹을 거 마실 거 다 차려줍니다. 심지어 등산화 끈도 와이프가 매어 준다니까요..!"


"헉~! 그런 인간문화재 같은 분이 계시단 말입니까..? 완전 남자들의 로망이네요."

내가 맞장구를 쳤다.


옆에서 엷은 미소에 살짝 이마를 찌푸리고 남편 말을 듣고 있던 사모님이 말씀하셨다.

"그건 그분 배가 나와 스스로 신발끈을 맬 수 없기 때문에 대신 매어주는 거고요.. 뱃살 빼라고 아내분이 등 떠밀어서 산에 가는 거고요.. 게다가 그분은 아내분이 해달라는 거 다 해줍니다. 얼마 전엔 또 다이어 반지에.. 명품백에..."


아하~ 그랬구나~!

그분은 재력가셨구나...

내 머릿속 386 논리회로로도 그 정도는 단박에 이해하였다.


우리같이 돈 없고 별 볼 일 없는 남편 나부랭이는 몸으로 때우는 수밖에...


아~ 남자는 나이가 들면 서럽다.

몸에 기력은 점점 떨어져 가는데.. 홈그라운드에 버티고 선 아내의 목소리에는 점점 힘이 들어간다.


나도 왕년엔 잘 나갔는데...



<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