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라노 중앙역 8시
기차는 8시에 떠나네. 아그네스 발차의 노래가 흐르고 있어야 하는데 어떤 모습으로 기다리는 중일까? 안개 낀 파리의 기차역 모퉁이에서 아랍의 이민자들이 은방울 꽃다발을 팔고 있던데, 밀라노 기차역에선 뭘 파나? 보여줘, 추억에 젖어 보게~.
8시 기차를 탈거라는 내 말에 친구가 이렇게 문자를 보내왔다. 이른 아침의 밀라노 중앙역을 휘익 둘러봤다. 쌀쌀한 듯 쾌청한 찬 공기가 시원하다. 연인의 어깨에 긴 팔로 감싸 안은 이태리 연인들이 키스를 하거나 기차를 타기 위해 성큼성큼 걸어가고 있다.
아~주 오래된 부부는 기차에 오르기 전 남자는 급히 담배연기 피워 날리고 여자는 무심히 먼저 기차에 올라 두리번거려 좌석번호 찾아 앉아서 주섬주섬 카메라를 꺼냈다. 담배냄새를 몸에 묻힌 채로 기차에 올라선 남편은 카메라 렌즈를 마운트하고 있는 내 옆자리로 와서 앉아 머플러를 푼다.
인생에서 비행기를 타고 올라가는 몇 초보다 더 큰 해방감을 주는 시간은 찾기 힘들다...라고 알랭 드 보통은 여행의 기술에서 말했지만 그게 어찌 비행기뿐이겠는가. 이렇게 여행지에서 이동하는 기차에 올라 출발 시동음이 울리며 덜컹거릴 때 떨려오는 신선함이 나는 좋다. 차창밖의 낯선 풍경과 만날 때마다 가슴이 뛴다. 나를 어딘가로 데려가는 이동수단에서 느끼는 살짝 두려움 섞인 기대는 짜릿하다.
기차는 밀라노 중앙역 플랫폼을 빠져나와 달리기 시작한다. 8시에 출발한 밀라노발 베네치아행 기차는 두 시간 반쯤 걸려 목적지에 도착 예정이라고 친구에게 보내기를 했으나 이태리는 데이터 서비스가 영 안 좋은지 전송 실패로 돌아온다. 다시 한번 시도해서 사진과 함께 보내기가 가까스로 성공.
<창 밖을 향해 한 곳을 바라보며 뭔가 다정한 대화를 나누는 건너편의 부부의 사진처럼 다정하시겠지? 밀라노의 연인들처럼 그대의 연인과 어깨동무하고 다니시는가? 여우짓이 어울리는 때와 장소이므로~>
서울의 친구는 마치 내게 말을 걸지 않으면 정신줄이라도 놓을 사람인양 쉬지 않고 말을 걸어왔다. 남유럽의 연말 기온은 겨울의 절정인 우리나라와 사뭇 다르다. 차창 밖은 가을과 겨울 사이 느낌의 풍경이 번갈아가며 스친다. 들판에 부는 바람이 느껴져 아릿하다. 베네치아가 조금만 더 멀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 어깨동무나 팔짱 정도야 어려울 것 없지. 뭐.. 아시겠지만 여우짓 안 해도 못해도 오래된 부부는 그것보다 더 단단한 깊이가 있으니 각자 다른 방향으로 걷는다 해도 생겨날 문제는 전혀 없음.>
이렇게 전송해 놓고 보니 모르는 누군가에게 충동적인 가슴 떨림도 없다는 것이 더 큰 문제 아닌가 하는 생각에 잠깐 자조했다. 이런 쓰잘 떼기 없는 얘기를 주고받는 동안 기차는 베네치아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