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매이듯 세비야, 두근거리는 마음에 담다

세비야 대성당과 알카사르 궁전과 그 골목을 맴돌던 날들...

by 리즈









그놈의 일정이란 것이 늘 걸리적거린다.

언제나 일정대로 살아야 하는 건 아니지만 누구나 어느 정도의 윤곽을 잡아놓고 그 시간들을 살아간다. 여행도 마찬가지다. 단체 관광객처럼 시간대별로 움직인다면 난 중도 이탈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함께 해야 할 시간들을 지켜주며 일정을 견뎌야 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이렇게 나만의 개인적인 여행에서도 때론 삐딱해진다. 흔히들 꼭 들러야 할 만한 곳에 가면 길게 줄을 서야 하고 무엇보다도 그 시간을 견뎌내야 한다. 여정 중에 과감히 포기하지 못하는 일정일 때 특히 그렇다. '내일이나 모레나 혹은 내년에 다시 오지 뭐~' 그럴 수 없는 입장이다 보니 어쩔 수 없다.



세비야는 큰 도시는 아니다. 서울처럼 복잡하지도 않다. 어지간하면 도보로 걸어 다니며 여행하기 좋다. 센트로에 밀집해 있는 세비야의 볼거리를 위해 걷는 일은 소소한 행복을 주는 여행이다. 조금 거리가 있는 곳은 트램이나 택시로 이동하면 된다. 걷는 것을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어쩐지 이 길 위에서는 걸어 다녀야 제 맛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알카사르는 대성당 옆에 있기 때문에 아침부터 그 둘레를 서성이듯 걸었다. 대성당을 본 사람들이 "이렇게나 어마어마하다니, 미쳤구나" 할 정도로 거대해야 한다는 그 옛날 참사 회의를 하고 지은 것이 대성당이다. 오랜 세월 동안 이슬람의 지배에서 벗어난 가톨릭 세력은 그 어마어마한 규모로 힘을 과시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슬람 사원이 있던 자리에 고딕 양식의 건물에 르네상스 양식의 조형미와 예술성까지 덧대어 100년이 넘도록 공들인 건축물이다.



이제는 1987년 유네스코 문화유산이 되었고 여전히 웅장함과 우아함이 바라만 보아도 압도된다. 그 아름다움은 멀리 떨어져 바라보아야 더 많은 것이 보인다. 길거리로 나가 뚝 떨어져서 또는 골목을 걷다가 잠깐씩 서서 뒤돌아 바라본다. 아름다운 몸체와 가까이서 안 보이던 첨탑과 종루가 아침 햇살에 쨍하고 빛난다. 그 옆의 104m의 히랄다 탑이 아스라하다.


걷다 보니 긴 행렬의 사람들이 눈에 들어온다. 알카사르 궁전에 입장하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나도 저기 서있어야 할 판이다. 서울에서 예약을 하고 왔어야 하는데 어쩔 수 없다. 그럼에도 주변 성당 주변과 산타크루즈 거리를 헤매듯 거닐었다. 이렇게 시간을 보내다 끝내면 허비한 시간이라고 할 사람들이 있겠지만 난 자주 그러고도 싶다. 줄 서기 엄두도 안 나고 그냥 이 도시를 쏘다니거나 나무 그늘 아래 멍하니 앉아있어도 괜찮다. 문명의 흔적 속에 그냥 가만히 있는 것, 이 또한 내겐 의미다.


어찌 되었든 알카사르 그 행렬에 줄을 섰고 한 시간의 인내심으로 입장권을 받았다.

세월이 느껴지는 올록볼록한 바닥이 내 발걸음을 중세 유럽으로 데려간다. 세비야를 요새화 한 건축과 그 속에 담겨있는 그림들이나 살았던 흔적들이 오늘날 끊임없이 이어지는 여행자들에게 마음으로 전해주는 역사다. 그들이 살았던 삶의 현장에 묘한 무늬의 다양한 방을 들여다본다. 기하학적인 디자인의 실내에 타일 문양이 섬세하다. 이슬람 문화와 스페인 문화가 융합된 매력적인 풍채의 궁전 안에서 시간의 더께를 느낀다.


가이드를 따라다니는 여행객들이 여기저기 눈에 들어온다.

이곳은 5유로의 한국어 오디오 가이드 퀄리티가 좋다. 홀로 여행이거나 한 둘이 개인적인 여행으로 하루를 조용히 둘러보는 시간일 때 참 좋을 듯하다. 욕심이지만 한적하니 조용할 때 호젓이 와서 쉬다가 걷다가 하면서 마음껏 사진을 찍고 싶다.


미로와도 같은 긴랑을 걷다가 멈춘다.

테라스 아래의 정원엔 분수가 떨어지고 중세의 사람들이 오가듯 오늘을 걷는 사람들이 가득하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시간을 오백 년 후쯤에 또 다른 사람들이 이렇게 몰려들어 구경하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 역사와 유래에 집중하는 사람들 틈에서 나는 하릴없이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다.


이젠 그런 시간 속의 장황한 기록에 심드렁하다.

다만 그것을 둘러싼 주변적인 이야기나 내 의식을 건드리고 내 감성을 툭 치는 것에 눈길이 오래간다. 마치 아침에 마신 커피 향이 내 코 끝에 길게 남아 기분 좋게 하는 것처럼. 지나고 보면 그것이 나만의 것이 되는데 온갖 뇌파를 굳이 무리하게 가동할 여력이 없다.




오늘도 이렇게 세비야 골목을 이리저리 걷고 대성당과 궁전을 두근거리며 마음에 담았다. 나를 둘러싼 풍경 속에서 내 발걸음대로 터덜터덜 걸으며 놀았으니 아쉬울 게 없다. 여기서조차 내 마음대로 놀지 못하면 이 망할 세상 무슨 재미로 살아가라고. 내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고 거길 걷는 내 앞의 풍경을 바라보며 '오늘 햇빛 좋다, 너무 좋아' 했으면 득템의 하루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