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의 기억 한 두 가지~
조금 저렴해서 몇 가지 사온 식재료들이 있다.
다녀온 후 틈틈이 그것들을 이용해서 식탁에 올릴 때면 여행지의 풍경이 오버랩되는 시간이다. 그래서 심신이 다운되었을 때 기분전환용으로 좋다. 별다를 것 없는 일상에 때론 약발이 되고 활력소가 되어주기도 한다.
오나가나 노천카페가 많아서 잠깐 쉬고 싶게 한다. 공원 벤치에 앉아 지도를 보거나 아마 맛집 찾기도 하는 듯한 사람들, 은근 동지의식이...
세비아에 도착한 것은 늦은 오후여서 시간이 걸리는 어딘가를 보러 다닐 생각은 없었다. 일단 숙소의 주전자에 물을 끓였다. 숙소가 4층이어서 아랫 마당에서 떠드는 사람들의 모습이 잘 보이고 소리도 들려왔다.
그런 창 밖을 내다보며 커피를 마시고 잠깐 쉬다가 동네 마실 나가듯 슬슬 나가볼 생각이었다.
문득 여행가방에 컵라면 두 개를 넣어온 것이 생각났다. 얼른 포트에 물을 더 넣어 팔팔 끓여서 컵라면 용기에 부었다. 갑자기 컵라면 앞에서 두근두근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하는 건 뭐지? 호텔 조식 또는 현지 음식점이나 길거리에서 끼니를 해결하다가 직접 조리(?)한 식사를 하게 될 순간이다. 먹을 수 있을지 어쩔지 모르겠지만 여행가방 구석에 담아 온 것은 내게 신의 한 수였다.
며칠 만에 먹어보는 일상의 매콤한 맛, 아, 더 가지고 오는 건데...
겨우 한 젓가락 후루룩 먹기 시작했는데 이런 생각이 스친다. 유럽의 어느 모퉁이 골목의 호텔방에서 맛보는 얼큰맵싸함이 감동일 줄이야.. 머릿속과 몸 전체가 행복해지는 경험이다. 마치 입덧을 가라앉히듯 온몸이 평정된다~
어둠이 내리는 숙소 주변 세비야 골목을 편안한 발걸음으로 걷는다. 여행지에서의 느긋하고 기분 좋은 저녁 산책. 고맙다. 매운맛 컵라면~.
뭘 먹을까 생각할 때 늘 눈앞에 보이던
파에야, 하몽, 추로스...
그곳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던 먹거리~
하몽 파는 골목에는 쿰쿰한 듯 비릿한 듯 알 수 없는 냄새를 느낄 수 있다.
소금에 6개월 정도 절여 숙성했기에 전쟁 시절에 지원하기 좋은 식재료였을 것이다. 스페인 대항해시대 군인들에게 단백질을 보충하던 전투식량이었던 것이 이제는 스페인의 대표 음식이 되었다. 하몽이 주렁주렁 매달린 가게마다 맥주와 함께 즐기려는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레스토랑 밖에 노천 테이블이 있고
창 밖으로 오래된 공원이 내다보이던 식당,
그날 비가 내려 을씨년스러웠고 나는 따뜻한 실내가 필요했다.
도무지 맛있게 잘 먹었다는 생각이 안 들었다.
그냥 건강한 맛? 먹어보기식 식사인 듯한 느낌...
역시 그동안 건강하지 않은 것들이 맛있었다는 사실~
무척 신선한 생선이었다는 건 느껴졌다.
뭔가 괜히 돈만 쓴 기분
익숙한 커피와 맥주, 디저트로 나온 찐~한 브라우니만 입에 맞았다고나 할까.
호텔 조식은 늘 넘쳐나게 푸짐했지만,
주로 지중해의 과일과 샐러드 위주로 먹었다. 신선한 맛은 언제나 기분 좋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치즈와 햄, 하몽과 같은 발효 훈제품이 어찌나 종류가 많던지
호기심 때문 조금씩 일일이 맛보기 하느라 입안의 짭조름함이 내내 따라다녔던 쫌 개운치 않던 기억이~...
골목마다 100년도 훨씬 넘는 식당들이 많았다.
가게의 역사를 문패처럼 인증서를 붙여놓은 고풍스러운 집들의 자부이 우선 신뢰감을 갖게 하긴 한다. 골목에 다닥다닥 이어져 있는 가게들마다 스페인을 알리는 맛이 가득가득~.
마드리드의 산 미구엘 시장은 19세기에 지어진 철골구조의 외관이 멋진 시장이다. 그 예스러움도 간직한 채 현재 진행형의 시장이다. 먹거리가 넘쳐나고 모든 식재료를 구경할 수도 있고 구입할 수도 있어서 구경하느라 정신없다. 중세시대부터 생겨난 산 미구엘 시장, 각종 식료품과 작은 음식점이 오밀조밀 모여 있다. 시간이 촉박해서 그냥 휙 지나왔지만 여유로운 시간으로 그 시장 구경에 한나절을 보내고 싶었다.
여행 중 현지에 가장 빠르게 적응하기 좋은 것이 음식이다.
낯선 그곳과 가장 빠르게 친근해질 수 있는 효력이 있다. 맛의 기억은 그곳이 어디든 가장 빠르게 데려다주는 마력이 있다. 그것이 별스럽지 않은 하찮은 맛이었을지라도.
만약 당신이 음식을 거부하고, 복장을 무시하고, 종교를 무서워하고, 사람들을 피한다면, 차라리 집에 있는 게 낫다. - 제임스 미체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