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다름없다. 덥다 덥다 하면서 어느덧 가을 쪽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입추와 말복이 지나면서 끝없을 것 같은 폭염이 슬그머니 한 풀 꺾이는 걸 해마다 보면서 절기란 게 참 기막히다는 생각을 한다. 가히 비현실적이었던 기온이었다. 빌딩 숲을 향해 쏟아지는 뜨거운 햇빛 속으로 한 걸음 나가기가 겁이 났다. 세상이 다 흐느적거렸다. 도저히 그 시간들이 흘러갈 것 같지 않더니 지나고 나니 그래 봐야 단 몇 주 동안의 더위였다.
끈적이던 더위가 언제였나 싶게 아침이 밝아오면 상쾌하다.
이럴 때 새벽에 한 번 나서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연꽃 보러 나서기엔 이미 많이 졌고 수련만 남아있다. 근처 공원의 새벽도 좋다. 그리고 서울에서 멀지 않은 안성 목장의 보리밭이 있다.
서울에서 자동차로 1시간 반 정도 어둔 새벽길을 달리면 나타나는 안성목장의 보리밭,
내가 갔을 때는 안개도 일출도 한 점 빛도 그 어느 조건도 시원치 않았다. 하늘도 흐리고 밤사이 내린 비로 군데군데 물 웅덩이를 조심해야 했다. 다만 초록의 보리밭 언덕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더 바랄 게 없다. 산책하듯 보리밭 사잇길을 지나고 풀잎 사이로 반짝이는 물방울이 구르는 것을 쪼그리고 앉아 구경한다.
거기서 잠깐만 더 이동하면 나타나는 고삼저수지,
근처 마을은 아침이 시작되고 있었다.
하늘은 우울한 듯 흐린데 새벽빛이 어려 있는 저수지는 물이 찰랑이고 물결 따라 반영이 잔주름으로 흔들린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 '섬' 이 촬영되었던 곳이다.
사방이 고요해서 사람들의 작은 인기척에도 화들짝 놀라는 고요한 시간이다.
물 위에 둥둥 떠있는 좌대와 함께 영화의 장면처럼 신비로움을 자아내는 시간이다. 조용히 그 물결을 바라보다가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