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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즈 Aug 27. 2019

적멸보궁(寂滅寶宮) 이야기, 건봉사

나의 적멸보궁(寂滅寶宮) 이야기. 라벤더. 오호항









까마득한 시절에 친구와 떠난 여행에서 마침 절에 다달았을 때였다.

유명한 절이었는데도 사람이 드물었고 조용하고 정갈해서 무척 마음에 끌렸다. 사찰 가까이 다가가니 적멸보궁이라는 현판이 눈 앞에 있다. 친구랑 가만히 서 있다가 무언가에 이끌린 듯 신발을 벗고 들어가 절을 올렸다. 무슨 마음에서 절을 올렸는지 모르겠지만 순간 알 수 없는 것들이 마음 가득 차오르는 듯했었다. 그리고 절 밖으로 나오면서 잡념을 떨친듯 개운한 이 기분은 무엇인지. 산길을 내려오면서 몸이 날아갈 듯 가뿐했던 것은 절을 하면서 내가 빌었던 소원이 꼭 이루어질 것 같은 철없는 확신 때문이었다.


시간이 흐른 후 내게 그렇게 각인된 적멸보궁은 허술하기만 한 내 마음에 영적인 기운을 주는 곳이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해 여름 땀범벅이 되어서 들어섰던 사찰이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되는 건 요즘 내게 그런 시간이 간절하기 때문이 아닐지. 그 시절의 친구는 이제 세상에 없지만 적멸보궁은 착하고 이쁘던 내 친구와 그 시절이 동시에 떠오르게 하는 곳이다. 스무 살 초반의 순수하고 맑았던 시절이었다.


아마 그때부터인 것 같다. 적멸보궁은 지금도 감사와 염원을 올리는 곳이란 생각을 한다. 아들아이가 군대 가기 전의 강원도 가족여행에서도 굳이 최북단 마을 끄트머리 고성에 있는 건봉사의 적멸보궁에 들렀었다. 불교신자는 아니었지만 내 마음의 기도가 전해질 것만 같은 곳이다. 내가 좋아하는 절이다. 물론 아들은 군인으로서의 의무를 잘 마쳤고 요즘도 난 가끔씩 적멸보궁이 있는 절에 가고 싶어 한다.



강원도 고성 건봉사 적멸보궁


적멸보궁[寂滅寶宮]

'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시대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석가모니의 진신사리와 가사를 전수받았다. 선덕여왕 12년(643)에 귀국하여 오대산 상원사, 태백산 정암사, 양산 통도사, 설악산 봉정암에 사리를 봉안하고 마지막으로 영월에 법흥사(法興寺)를 창건하여 진신사리를 봉안했다. 통상 이를 우리나라의 5대 적멸보궁(寂滅寶宮)이라 한다.


이 밖에 건봉사, 용연사, 도리사, 대견사, 다솔사, 장안사, 법계사 등 많은 곳에 적멸보궁이 있다. 적멸이란 모든 번뇌가 남김없이 소멸되어 고요해진 열반의 상태이며 보궁은 보배 같은 궁전이란 뜻이다. 즉 적멸보궁이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법당을 말한다.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셨으므로 불단(수미단)은 있지만, 불상이나 후불탱화를 모시지 않는다. 법당 바깥이나 뒤쪽에 사리탑을 봉안했거나 계단(戒壇)이 있다.-지식in




여름이 한창인 강원도 고성의 건봉사 가는 길은 생각보다 한적하다. 오는 길에 라벤더 꽃밭을 보고 왔는데 그 화사해진 마음을 지긋하게 눌러주는 힘이 전해진다. 입구 마당의 사명대사와 한용운 님을 기리는 기념관을 둘러보고 그 옆의 '사랑하는 까닭'이라는 한용운 님의 시비를 들여다본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입구의 일주문이 오래된 자태로 다정히 반기듯 서 있다.

6. 25 전쟁 중 파괴되지 않은 유일한 건축물인 불이문(不二門)이다. 일주문의 기둥은 보통 2개인데 건봉사 일주문은 4개의 기둥이 세워져 있다. 불이문을 지나면 오른쪽에 법당이 있었던 널찍한 절터가 펼쳐진다. 드넓은 터는 전쟁으로 소실되기 전 당시 절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을 만하다.




같이 갔던 일행들은 능파교를 건너 대웅전엘 먼저 갔지만 나는 적멸보궁 쪽으로 향했다. 사람들이 적을 때 먼저 조용히 보고 싶었다. 돌계단을 오르고 어리연이 뒤덮은 양쪽의 연못에 뙤약볕이 쏟아지고 있다. 마침 앞서 가던 두 분의 수녀님이 샘가에서 물을 마시고 있다. 조용조용히 이야기를 나누며 사찰의 이곳저곳 꼼꼼히 살펴보는 수녀님의 뒷모습이 어쩐지 보기 좋다.


모든 번뇌가 남김없이 소멸되어 고요해진 열반의 상태인 적멸(寂滅)과, 보배같은 궁전이란 보궁(寶宮), 발걸음 소리만 들리는 고요하기만 한 적멸보궁 안을 들여다 보고 뒤편으로 가본다. 부처님의 치아 진신사리를 모신 사리탑을 숲이 감싸고 있다. 그 아래 촛불 기도를 올리는 분이 있어서 나도 기다렸다가 초를 하나 사서 마음을 담아 촛불 공양을 했다. 이런 사소하고 어설픈 짓이 괜히 위안이 되는 가엾은 중생...



내려오면서 대웅전을 들러 나오는 길에 펼쳐진 반세기 동안 보존되어 오는 자연 속에 내가 있음을 느낀다. 지금은 불에 타고 소실되어 주춧돌만 남았더라도 도처에서 그 시절이 보인다. 천년의 세월을 보여주는 부도탑도, 돌솟대도, 스님들이 사용했다는 대형 돌확들도 그나마 여전히 잘 보존되어 그 자리를 지켜준다면 좋겠다. 훗날 누군가가 찾아오더라도 이 대찰에 걸쳐진 만만찮은 긴 세월을 상상하기 어렵지 않도록.










추가 사진으로 조금 더 보기~

건봉사의 역사기록 사진들 - 퍼옴

금강산 건봉사는 창건 당시부터 백성의 안녕과 국가의 번영을 기원하는 도량이었다. 신라 사찰 건봉사는 고구려 땅에 창건됐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강한 상징성을 갖는다. 전쟁의 한가운데서 백성의 안녕과 국가의 번영, 평화를 기원하는 사찰이 창건 당시의 건봉사였던 것이다. 발징 화상이 주도한 제1차 만일 염불 결사 역시 불, 보살님의 가피로 중생을 제도하려는 자비의 발로였다. 임진왜란 당시 사명대사를 중심으로 한 의승군 참전 역시 백성의 희생을 막기 위한 생명 제도와 구국의 결의였다.


건봉사의 천년 역사 저변에 흐르는 중생 제도와 구국의 정신은 일제강점기에도 그 저력을 발휘한다. 일제 강점기 건봉사는 민족정기를 굳건하게 지켜내고 항일 독립 전쟁을 이끌기 위한 인재 육성, 국채보상운동, 실질적인 독립 전쟁으로 발현한다. 그 중심에 만해 한용운 선사와 선사의 사제 금암(錦巖)이 있다.

-봉명 학교 설립취지문. 황성신문. 1907년 1월 26일-



임진왜란 당시 6,000여 명의 의병을 양성하고, 왜구가 약탈해간 부처님 진신 치아사리를 1605년 사명대사가 사신으로 일본에 다녀오면서 되찾아와 이 절에 사리탑을 세워 보관한 사명대사와,

1928년 당시 건봉사 승려였던 만해 한용운은 대화재로 사라진 자료를 수집해서 ‘건봉사와 그 말사의 사적’을 발간했다. 두 분을 기리는 기념관.  


강원도 고성 8경 중 제 1경인 건봉사는

건봉산에서 내려다보면 건봉사가 연꽃 모양을 하고 있다.


마음, 마음들..





건봉사 가는 길에,


강원도 고성군 간성읍 어천리 하늬 라벤더 팜,

초여름까지는(6~7월) 보랏빛 꽃무리와 라벤더의 찐한 향기를 즐길 수 있다.

라벤더뿐 아니라,

산촌의 풍경과

밀밭과

갖가지 꽃들의 물결을 볼 수 있는 곳.




그리고

오호항의 바다가 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565635&CMPT_CD=SEA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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