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뮌헨, 그리고 전혜린...

그해 시월에 난,

by 리즈




가만 보면 요즘의 아이들은 대체로 책을 많이 읽는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대입 때문에 논술이 대세를 이루고 교양과 상식을 위한 목적성 책 읽기를 독려하는 모습은 흔히 보지만 미친 듯 책을 읽어대던 우리 시절의 아이들과는 약간은 구별이 되는 것 같다. 물론 나와 같은 문자 세대와 요즘의 영상세대의 시대적 현실을 비교할 일은 아니겠다. 꼭 책이 아니어도 보고, 듣고, 순간순간 즐길 일이 그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발달된 것도 이유가 되긴 할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우리 중고등학생 시절엔 참 많이도 책을 읽어댔던 것 같다. 대체로 한국문학이나 외국문학 작품이 중심이었지만 그 외에 닥치는 대로 두루 섭렵하던 시절이었다. 아마도.. 요즘 아이들과 우리 청소년기와 비교해 볼 때 책을 '읽는 것'과, '좋아하는 것'의 차이가 아닐까 생각해 보기도 한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지금도 그런지 모르겠지만 청소년기에 누구에게나 한 번씩은 읽혔을 글이 있었다면 전혜린의 글일 것이다. 그녀의 글을 읽으며 生을 사랑하는 것과 인식애, 그리고 절실한 고독과 열정... 무엇보다도 독일, 뮌헨, 그중에서 슈바빙... 먼 곳에의 그리움과 환상을 처음으로 갖게 하던 곳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번 여행 중에 새롭게 그녀 생각을 떠올렸다. 전혜린의 슈바빙(Schwabing) 은 거기 있었다. 그녀가 한국에서는 맛보지 못했던 삶의 본질을 깊이 체득하며 살았던 4년간의 유학생활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슈바빙을 알게 했던 글들 속의 슈바빙 구(區) 레오폴드 거리.


내가 독일의 땅을 처음 밟은 것은 가을도 깊은 시월이었다.
하늘은 회색이었고 불투명하게 두꺼웠다.
공기는 앞으로 몇 년 동안이나 나를 괴롭힐 물기에 가득 차 있었고 무겁고 척척했다.
스카프를 쓴 여인들과 가죽 외투의 남자들이 눈에 띄었다. 아무도 없는 비행장 뮈헨 교외림에 내렸을 때 나는 울고 싶게 막막했고 무엇보다도 춥고 어두운 날씨에 마음이 눌려 버렸었다.

-회색의 보도와 레몬빛 가스등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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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나는 뮌헨의 가을 하면 내가 처음 도착한 해의 가을이 생각나고 그때의 심연 속을 헤매던 느낌과 모든 것이 회색이던 인상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아무것에도 자신이 없었고 막막했고 완전히 고독했던 내가 겪은 뮌헨의 첫가을이 그런데도 가끔 생각나고 그리운 것은 웬일일까? 뮌헨이 그때의 나에게는 미지의 것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안개비와 유럽적 가스 등과 함께 내가 그리워하는 것은 그때의 나의 젊은 호기심 인지도 모른다.
나의 다시없이 절실했던 고독 인지도 모른다. 1953년 11. __ 전혜린,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중에서...


내가 살고 있는 뮌헨 북부의 일구(一區)는 슈바빙이라고 불리는 독특한 지대다.
슈바빙이라는 단어는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파리의 몽마르트르나 쌩 제르맹 데 쁘레와 마찬가지고 한 개념이 되어 있다. 이 지대의 역사도 굉장히 오래되어 있어서 이십 세기에 어떤 일족이 이동해와 정착한 것에서 출발하여 점점 발전하고 확장되어서 결국은 뮌헨이라는 대도시가 생겨나다고 한다. 따라서 슈바빙은 뮌헨의 핵심이라고 말할 수 있다. 슈바빙을 유명하게 만들고 독일의 다른 도시 또는 도대체 독일적인 것과 구별하고 있는 것은 그 오랜 역사 때문이 아니라 특유한 분위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엇이라고 정의 내릴 수 없는 독특한 맛----[슈바빙적]이라는 말속에 총괄되는 자유, 청춘, 모험, 천재, 예술, 사랑, 기지...... 등이 합친 맛으로서 옛날의 몽마르트르와 비슷하기는 하지만 전혀 다른 자기의 맛을 가진 정신적 풍토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일차 대전 후의 몽마르트르나 이차 대전 후의 쌩 제르맹 데쁘레에 일말(一抹)의 우수(憂愁)(독일의 로만 티스 무스의 안개)와 게르만의 무거운 악센트를 붙인 곳이라고나 할까?
슈바빙의 주요 도로인, 거대한 포플러 가로수로 장식되어 있는 아름다운 레오폴드가를 따라 올라가면 사람들은 언제나 평범한 셀러리맨과 중산계급 주부들에 섞인 슈바 빙가(슈바빙족)들을 볼 수가 있다.
도로에 의자와 테이블을 내놓은 테라스, 카페에 앉은 보들레르식 머리를 기르고 [실존주의자 수염](반 고흐 식 수염으로, 화가 수염이라고도 한다)을 기른 검은 스웨터에 검정 코르덴 바지를 입은 청년과 마리나 블라디 또는 브리짓드 바르도 식 머리를 한, 화장은 안 하고 눈가만을 검게 그리고 끝을 올린 소녀들이 바로 그들이다. 한 잔의 카레 또는 아무것도 안 마시고 담배만을 연거푸 피우면서 몇 시간 간이라도 그들은 토론하고 있다. 그들의 화제는 몹시 시대정신과 저널리즘에 민감한 것을 나타내고 있으나 특별한 것은 없다.
예를 들면 영화와 축음기판, 쥴리 옛 타 마시나와 하이 데카, 라이오 넬 햄튼과 석간신문, 시, 기계, 건축, 연애, 강의 노트, 소련의 로켓.... 등이 화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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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온갖 것이 합리와 이성으로 처리되는 독일에 빌고 싶은 것은
[슈바빙과 함께 보헴의 정신이여! 길이 살아라] *1958년 전혜린

뮌헨 대학에서 내 하숙에 이르는 레오폴드 통(通)은 거대한 꼿꼿하게 높기만 한 포플러 가로수로 줄지어져 있었다. 그 길이 온갖 빛의 낙엽으로 두껍게 깔리기 시작할 무렵에 가을이 가장 아름다웠다.
그 거리에는 작은 어항같이 생긴 [유리 동물원]이 있었다.
유리로 기막히게 정교하게 만든 온갖 작은 짐승들, 도자기, 발레리나들.... 안데르센 동화 속의 나라 같았다. 나는 매일 그 앞을 지날 때마다 오 분 이상이나 진열장을 들여다보곤 했었다. 갖고 싶고 애무하고 싶은 동물들이었다. 그 가게 뒤에 쓰러져 가는 [노아 노아]라는 집이 있었다. 거기는 다다이스트의 집합소로서 늘 해괴하고도 기상천외인 그림들이 잔뜩 붙어 있었다. 화가들이 수염을 늘어뜨리고 떠들며 談論(담론)하는 사롱이기도 한 것 같았다. 때로는 에리카만의 낭독회도 열리는 모양이었다. 그 무렵에 나는 제에로오제보다 더 싼 음식점을 발견했다. 서서 먹는 집이었다. 흰 소시지를 불에 구워서 겨자를 발라서 먹는 소시지 집이었다.
거기에다 신 오이 한 개와 리모나 아데 한 컴을 먹어도일 마르크가 안 되는 싸기도 하려니와 냄새만으로도 이끌려 들어가게 맛이 있었다. 먹는 것은 간단히 빨리.... 그리고 나는 걸어 다녔다. 학교에서 내방까지 사이의 골목, 골목, 그리고 영국 공원 속... 이러한 곳이 내 산보지였다. -전혜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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뮌헨을 생각하면서 전혜린의 슈바빙을 떠올리지만, 물론 슈바빙은 당연히 가볼 생각이었고 나는 그 글 속의 영국공원에도 꼭 들러보고 싶었다. 그녀가 즐겨 산책 나가던 곳, 먼 이국에서 외로움에 떨며 호숫가에 앉았을 마음이 어떤 것이었을지, 내게 강한 인상으로 내 기억 속에 남아있는 영국공원.

영국공원이란 영국식 공원을 말하는 것이라고 했다. 인공미가 많은 프랑스식 공원에 비해 영국공원은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는 말이었다.

그녀가 자주 찾았던 영국공원의 호수까지는 가지 못했다. 공원 둘레만 쭉 돌아서 후문인 듯한 곳으로 걸어서 마을 사람들이 오가는 도로로 나왔다. 거대한 공원을 샅샅이 들여다 보기엔 시간이 여유롭지 못했고, 이 공원에 별 흥미를 갖지 못하는 남편에게 긴 시간 함께 하자고 할 자신이 없었다.

글 속의 분위기를 떠올리면 매우 한적하고 가을의 고독이 바스락거릴 것 같은 생각이었는데 오늘날의 영국공원은 잘 가꾸어진 조경으로 시민들이 적절히 잘 활용하고 있는 공원이란 느낌이었다.

그 옛날, 백조가 떠 있는 호수에 수선화를 던져 넣었고, 심연을 흔든 편지를 매장했다고 했던 곳, 외로움과 쓸쓸함이 안개처럼 휘감고 있을 것만 같았던 그 공원에는 놀이를 즐기는 아이들과 야구공을 치는 단단한 배트 소리와 학생들의 함성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자전거를 타고 그 길을 가로질러 어디론가 달리고 있는 사람들... 지역주민들의 휴식처인 듯하다. 그녀의 영국공원이 아직도 그 옛날의 숨결을 이어가며 오늘에 이르고 있을 거란 생각을 해 보았다.

솔직히 내 청소년기에 읽었던 글 속의 장소에 내가 와 있다는 것이 참 흥분되는 걸 느꼈다. 저 벤치에 그녀가 앉아서 외로움의 대상인 호수를 바라보며 고적한 시간을 보냈겠다... 마치 답사를 하듯 그 궤적을 따라가며 확인을 하듯 살펴보는 예상치 않았던 내 모습도 우스웠지만~ 계절도 이즈음이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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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구에 안내 게시판이 있다.
엥리쉐 가르텐(Englischer Garten)


공원으로 들어서기 전에 작은 파도가 있는 계곡이 있는데 젊은이들이 서핑을 하고 있었다. 늦가을의 쌀쌀함 속에서 곡예하듯 열심히 파도와 겨루기를 하는 듯 즐기는 모습이다.


.... 그리고 나는 걸어 다녔다.
학교에서 내방까지 사이의 골목, 골목, 그리고 영국공원 속... 이러한 곳이 내 산보지였다.
어떤 날 나는 백조가 마지막으로 떠 있는 것을 저녁 늦도록 지켜본 일이 있다.
어둑어둑한 박명(薄明) 속을 흰 덩어리가 여기저기 모여 있었고 때때로 바스락 소리를 냈다. 몹시 외로워 보였다. 나 자신의 심경이 그대로였는지도 모른다 내가 마음속을 뒤흔들린 편지를 매장한 곳도 이 호수였고, 내 꿈과 동경(몇 년이나 길게 지속되었던)을 던져 넣어버린 곳도 이 호수 속이었다. 이 호숫가의 가스 등 밑에서 나는 안개에 감싸이는 쾌감과 머리를 적시는 눈에 안 보이는 비를 맛보았다. 그리고 추위에 떨면서 귀로에 서곤 했었다. 1953년 11. __ 전혜린 글 중에서...


뮌헨의 시월이 그립다.
거기에 있을 때는 언제나 이렇게 추운 가을은 처음 보았느니 한국의 가을 하늘을 못 본 사람이 가엾느니 하면서 새파란 하늘, 주렁주렁 달린 감나무, 석류, 추석 보름달, 독서의 계절, 천고마비 등의 이미지와 불가분인 한국의 가을을 그리워했었다. 끔찍한 김장 시즌조차도 못 견디는 향수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돌아온 지 2년째 되는 요즈음 웬일인지 자꾸 뮌헨의 가을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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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정적으로 사는 것,
지치도록 일하고 노력하고 열기 있게 생활하고,
많이 사랑하고, 아무튼 뜨겁게 사는 것,
그 외에는 방법이 없다.

- 전혜린의 《이 모든 괴로움을 또다시》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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