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 나는 비행기 따라~
살다 보면 가끔씩 기억 속의 한 장면이 떠올라 가슴 뭉클하게 행복하거나 그리워질 때가 있다. 그래서 그것이 한 동안 내 머릿속을 맴돌면서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갈 때가 있어서 즐겁기도 하다.
아주 오래전 신혼시절, 아직은 익숙지 않던 낯선 동네의 창 밖으로 아스라이 한 점 비행기가 날아가는 게 보일 때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그 시간 즈음 항공사에 근무 중일 신랑이 불현듯 보고 싶어 지는 것이었다. 심지어는 나도 모르게 살짝 눈물이 나기도 했었다. 아마도 그렇게나 사랑했고 애틋했던 모양이었다. 매사 무뎌질 대로 무뎌진 지금 생각해봐도 참 풋풋했던 날들이었다. 그리고 그런 시간들이 지나고 누구나 그렇듯이 몇 번의 이사를 하면서 세상을 살았다.
어느 해 봄과 여름 사이의 계절이었다.
그해 이곳으로 이사 오기로 결심한 것은 순전히 아카시아 향기 때문이었다.
집안에 들어서면 베란다 넓은 창 가득 야트막한 산과 하늘이 반반씩 채워져 있어서 순간 마음을 빼앗겼던 것이다. 그리고 창문을 여니 바람내음이 싱그러웠고 막 피어나기 시작한 아카시아 향기에 더 고민할 것도 없이 결정해버렸다.
그렇게 살기 시작하면서 해마다 오월 무렵이 되면 창밖 숲은 연둣빛으로 물들고 새하얗게 아카시아꽃이 피어나기 시작해서 언제나 날 행복하게 했다. 가을이면 부드러운 가을빛깔로 온통 물든 모습이었고 내 산책길은 바스락거리며 계절을 만끽시켜주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낙엽 떨군 스산한 겨울의 숲에 눈이 내리면 그 또한 나만의 한 겨울 정취를 마음껏 누리게 해 주었다.
또한 그 길을 산책하다 보면 저 멀리 하늘 위를 날아가는 비행기도 바라볼 수 있었다. 오늘도 누군가는 멀리멀리 날아가 또 다른 세상을 만나겠지... 하면서 그들의 일상을 상상해 보는 것도 나름대로 설레는 즐거움이었다. 그뿐인가. 이른 새벽 일출의 신비로움과 함께 형언하기 어려울 만큼 아름다운 저녁노을의 변화를 날마다 바라본다. 이 모든 느낌들과 풍경들이 온전히 내 것이 되는 일상인 것이다.
이곳으로 터전을 옮기기로 했을 때 가까운 이웃이 조심스럽게 걱정을 해주었었다.
나중에 비행기 소리가 혹시 집값에 영향을 줄 수도 있을 텐데 괜찮을까 하는 염려였다. 물론 나도 생각은 해보았던 사항이었는데 직접 확인해 보니 걱정할 만큼 소리가 나는 거리도 아니어서 그다지 문제는 아니었다. 막상 살아보니 역시 큰 문제는 없었다.
어릴 적 푸른 하늘에 하얀 줄을 그으며 날아가는 비행기를 눈을 높이 들어 바라보며 세상 어디인가에 있을 낯 모를 사람들을 생각하며 꿈을 키우던 시절이 있었다. 이제는 그것이 소음이거나 주거생활의 마이너스로 작용하게 되었나 보다. 그런데 철 모르는 나는 그것을 문제 삼을 줄 모르고 넓은 창 가득히 산과 하늘이 들어오는 집을 삶의 터전으로 결정한 것이었다.
아침이면 일어나 넓은 창으로 바라보는 야트막한 산에서 안개가 피어오르고 산새가 노래를 부른다.
가끔 멀리 비행기가 날아가는 것이 보이면 먼 곳으로의 여행 충동으로 잠깐씩 설레어 보기도 한다. 숲에 비가 쏟아지고 눈이 내리고 안개가 자욱한 날의 풍경도 마음껏 만끽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창 옆에는 사시사철 바뀌어가는 숲을 찍기 위해 카메라가 늘 준비되어 있다. 하늘 저 멀리 여행자들의 설렘을 싣고 날아가는 비행기를 쭈욱 당겨서 찍으려고 망원렌즈를 마운트 해놓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작은 숲과 함께 계절의 정서를 즐기고 도심에서 조금이나마 자연을 가까이 느끼게 하는 나만의 창밖 풍경을 사랑한다. 가끔 비행기가 멀리 한 점으로 지나갈 때면 내 유년기의 동심과 함께 싱그럽던 내 신혼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짜릿함도 있다. 그리고 어둔 저녁노을 속으로 비행기가 착륙하던 낯선 이국땅의 그 날이 떠오르기도 하고, 여행길의 내 자유로웠던 영혼이 떠올라 상큼한 비타민을 삼킨 듯 기분 좋게 일상을 살기도 한다.
이제 막 아카시아가 꽃을 피우려 하고 있다.
창문을 열어 그 향기를 맡으며 녹색의 울창한 여름 숲을 또 기다릴 것이다. 저 멀리 비행기가 한 줄 긋고 지나간 봄 하늘을 바라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