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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나라 앨리스 Jan 15. 2020

애착이 손상된 엄마에게 육아란

남들이 아이를 낳고 산후우울증에 걸린다고 했을 때 그게 뭘까? 싶었다.

임신기간내 주말부부였던지라 종종 혼자 산부인과에 가야할 때 진료대기실의 많은 부부들 속에서 혼자 미혼모같다는 느낌이 밀려왔어도 그렇게까지 우울하지도 않았다.

심지어 아이를 낳고서도 한동안 주말부부였던지라 1달 정도는 주변의 도움을 받고 이 후 약 1달 정도는 나 혼자서 낮과 밤을 그 어린 것을 데리고 발을 동동거릴 때도 그렇게까지 우울하지 않았다.

현실적으로 울적한 마음이 밀려와도 세상 가장 초롱초롱한 눈으로 가장 나를 사랑스럽게 쳐다보는 아이의 눈빛을 받으면 어디서 힘이 솟아나는지 살아생전 잠을 그리 못잤어도, 생살이 찢어지는 모유수유와의 사투를 해야했어도, 긴 밤의 두려움과 외로움을 수없이 겪었어도 견딜 수 있었다.      


나는 내 딸의 엄마이니까



누군가의 엄마라는 역할의 부여로 이렇게 막강한 책임감과 초능력을 갖게 될 줄이야.


남들이 아이를 낳고 산후우울증으로 너무 힘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어도 나는 생각보다 안 힘든데?하는 생각이었다.


남들이 아이를 낳고 산후우울증으로 아이를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도 나는 살아생전 이렇게 살아갈 이유가 생긴게 처음인데?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만을 원하던 내 아이.


나만이 줄 수 있는 것들.


이 것들의 조합으로 나는 내 아이와 끈끈한 동맹이 맺어진 것 같았고 그동안 그토록 원하던 유일한 내편이 드디어 생겨 삶의 충만함까지 생겨났다.


내 아이가 돌쟁이가 될 무렵까지 나는 육아가 힘들지 않았다.


수면부족, 뫼비우스 띠 같은 무한 반복의 집안의 난장판 속에서도 아이가 잠들면 그래도 이유식은 내 손으로 해서 먹이리라는 사명감에 한여름 뜨거운 불 앞에서 수없이 주걱을 저어가던 나날도 행복했다.


그러던 내가 아이가 돌이 지나가면서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육아를 통해 충만함을 느끼던 내가 충만은 커녕 점점 헛헛해지고 외로워져갔다.


아이가 내 품에서 서서히 떠나 세상을 향해 한발한발 내딛을 때마다, 세상을 향해 자신의 의사표현을 하기 시작할 때마다 내 안의 불안과 두려움을 만나야 했다.


요즘 내가 왜 내 아이가 돌이후 부터 불안과 두려움이라는 감정 속에서 허덕거리며 지내왔는지 생각해보니 그 감정의 시작이 언제가 시작이었는지 파악이 된다.


감정이라하는 것은 습관이기에 비슷한 상황에 놓이면 처음 느꼈던 그 감정이 무의식에서 자연스럽게 소환되어 반복된다. 


나는 내 동생이 태어나고 난 뒤 아마도 3~4살 쯤 할머니 집에 잠시 보내졌다. 아마도 기간은 단 몇일은 아니었던 듯.


나는 몇날몇일을 징글징글하게 울었다고 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징글징글하게 울어대는 것도 멈췄다고 한다.


어느날 엄마아빠가 나를 데릴러 왔다고 한다.


나를 데릴러왔던 내 엄마는 나를 보고 울었다고 한다.


왜? 내가 자기를 낳아준 엄마를 못알아봐서....본체 만체 해서...


내가 엄마가 되기 전 이 이야기를 들으면 나는 그냥 많이 운애 였구나...싶었다.


아이를 낳고 들으니 내 마음이 너무 아프다.


그 어린 나는 엄마아빠한테서 예고도 없이 떨어져서 얼마나 불안했을까...두려웠을까...


그 어린 내가 표현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들을 다 동원해서 나의 불안함을 두려움을 표현했어도 아무도 나의 표현에 귀 기울여주지 않았다.


아마도 그 어린 내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나를 도와주는 사람은 없음에 무력함을 느꼈을 것이다.


그 어린 나는 그때부터 가족에 대한 불신, 타인에 대한 불신이 생겼는지도 모른다.


그 어린 나는 그때부터 세상에 내 편은 없구나..나에게 안전한 대상은 없구나...를 느꼈나보다.


아이를 키우면서 읽었던 육아서들을 보면 애착이 안정된 아이들은 부모를 오랜만에 보아도 반가워하며 웃는다.


나는 오랜만에 부모를 만나고도 본체만체하고 반가워하지도 않은 걸보니 나는 그 때부터 애착이 손상된 듯 하다.


애착이 손상되었던 나는 아이를 낳고 유일하게 아이를 통해 끈끈함을 느꼈던 것 같다.


아이가 나만 바라봤을 때 나만이 아이를 위해 줄 수 있는 것이 있을 때에는 안정감을 느끼다가 아이가 나에게서 서서히 심리적으로 육체적으로 떨어지기 시작하면서 그 어린 내가 느꼈던 불안과 두려움의 감정이 서서히 올라왔다.


또 다시 안전한 대상을 빼앗길 것 같은 나.


또 다시 어디 맘 둘 곳 없이 외톨이가 될 것 같은 나.


또 다시 타인과 세상에 대한 불신 속에서 두려움에 떨 것 같은 나.


내 아이가 커가면서 나는 내 안에 이러한 나의 모습을 마주해야 했다.


내 안에 누가 볼까 두려워 꾹꾹 눌러서 억압해놓았던 불안과 두려움이라는 감정의 용수철이 느닷없이 튕겨오르면서 나는 감당이 되지 않았나보다.


그 감당되지 않은 감정의 버거움을 육아의 고단함이라 치부해버린 듯 하다.


애착이 손상되었던 나는 내 뱃속에서 나온 내 아이를 통해 생전처음 애착을 느꼈다.


생전처음 느낀 애착이 다시 희미해질까봐 두려워하고 있는 내가 있다.


아이는 엄마에게서 독립되어 서서히 세상을 향해 날 준비를 하고 있는데 아이가 훨훨 날아가서 내 곁을 떠날까봐 무의식에서 두려워하고 있는 내가 있다.


내가 어릴 적 성장하는 과정에서 느꼈던 불안과 두려움의 정도는 내 아이가 한살한살 커가면서 함께 커가고 있음을 느낀다.


이 정도 알아차린 것만으로도 나는 성장한 것일까?


아니면 아직도 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나는 덜 성장한것일까?


나는 적어도 내 아이가 성장하면서 훨훨 날려고 할 때 날개짓을 막는 엄마는 되고 싶지 않았는데  나에게도 내 아이의 날개짓을 막고 있는 찌질한 엄마의 모습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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