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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나라 앨리스 Jan 15. 2020

우리 세식구에게서 내 눈에 보이는 것들

나에게서 나의 엄마의 모습이 보인다.     

               

나의 엄마가 나에게 그러했듯이 나도 나의 딸에게 삶의 고단함을 여실히 드러내고, 짜증을 내고, 신경질적으로 대하는 모습을 본다.


그 모습이 그토록 싫었는데...

그 모습으로 나는 엄마에게 다가가기 힘들었는데...


가랑비 옷젖듯이 보고 자란게 무섭게 내 온 몸의 세포가 기억하고 있다.


나의 딸에게서 나의 어릴 적 모습이 보인다.



내 딸이 처음 태어났을 때 누가봐도 신랑의 판박이였다.


딸이 커갈수록 가족들은 이리 말했다.


"점점 지 애미 닮아가"


내 딸이 나를 닮아갈수록 나는 불안하고 두렵다.


어릴 적 나는 나 스스로도 내  존재자체를 부정하고 수치스러워했기에 그런 어린 나를 마주하는게 편하지 않다.


내 눈 앞에 마주하기 두려운 커다란 도깨비를 마주하는 기분이다.


나의 딸에게서 나의 날 것의 내면아이가 보인다.


나의 내면아이가 그토록 울고 싶었던 모습 그대로.


나의 내면아이가 그토록 발악하고 싶었던 모습 그대로.


나의 내면아이가 그토록 대들고 싶었던 모습 그대로.


나의 내면아이는 학습된 무력감으로 어느 순간 억압되어 꾹꾹 눌러놓고 살던 모습을 나의 딸은 나의 앞에서 날 것 그대로의 모습으로 드러낸다.


그런 나의 딸의 모습을 보면서 너는 나처럼 그러지 않아서 다행이다 싶다가도 나는 해보지 못한걸 하는 모습에 질투심도 밀려온다.


나는 딸의 모습에서 아이러니하게 양가감정을 느낀다.


나의 딸의 모습을 보면서 나의 부모가 나에게 그러한듯이 똑같이 대하기도 하고, 나름 육아서도 읽고 육아를 글로라도 배워 받아보지 못한걸 쥐어짜서라도 해주려고 한다.


그런데 애들은 안다. 


부모가 쥐어짜서 어거지로 하는건지, 자연스럽게 하는 것인지.


아이가 나의 무의식에서 쥐어짜서 어거지로 하는 것을 느낄 때에는 더 크게, 더 오래 지랄발광한다.


가짜가 아닌 진짜로 하라고.


신랑에게서는 나의 아빠의 모습이 보인다.




내가 결혼상대로 진작에  늘 마음속에 품고 있던 조건은 2가지다.


-술주정 안하는 남자

-오전에 출근했다가 저녁에 퇴근하는 남자


이 2가지 조건은 나의 아빠와 반대되는 사람이었다.


다행히도 나는 그런 남자를 만나서 결혼을 했다.


신랑은 결혼생활 10년동안 술주정을 하지 않았고, 심지어 자신이 알아서 많이 마셨다 싶으면 딱! 술을 조절해서 마신다.


신랑은 평범한 직장인들처럼 오전에 출근해서 저녁쯤 퇴근하는 직업이다.


허나 종종 내 아빠가 어린 나를 대하던 모습 그대로 내 눈 앞에서 내 딸을 대할 때가 있다.


내 엄마는 내가 아빠 앞에서 혼날 때, 주눅들어있을 때 나를 보호해주지 않았다. 


단 한번만이라도 내 편을 들어주지...하는 원망이 있다.


그런 내가 내 안에 있기에 신랑과 딸의 모습에서 내 아빠와 어린 나의 관계를 보면 이성을 잃는다.


신랑이 딸을 혼낼 때 나의 딸에게서 주눅들고, 불안하고, 두려웠을 어린 나의 모습이 보인다.


그럴 때 나의 뇌는 파충류의 뇌만 활성화되면서 필사적으로 나의 딸을 신랑에게서 떼어놓기 위해 애쓴다. 


나의 엄마는 어린 나를 보호해주지 않았지만 나는 필사적으로 나라도 어린 나의 내면아이를 보호해주기 위해 발악을 한다.


그리고 어린 내가 내 아빠에게 혼날 때 무서워 하지 못했던 말들을 신랑에게는 거침없이 해댄다.


그러한 나의 행동과 말들은 의식에서 이성적으로 하는 것들이 아니다.


그러한 나의 행동과 말들은 나의 무의식에서 나를 보호하기 위해 용수철이 갑자기 튕겨나듯이 하는 것들이기에 비록 현명하고 지혜로운 행동들은 아니다.


그렇다보니 나는 우리 3식구가 함께 있는 시.공간에서 나의 어린시절 엄마, 아빠, 나의 관계를 본다.


그 모습을 마주하기에 불안하고 두렵다.


그 모습을 마주하는 것은 나의 상처를 담아둔 판도라의 상자를 묶은 끈들을 푸는 작업과도 같다.


그래서 그동안 독박육아를 자처해서라도 요리조리 회피하고 싶었다.


그런데 이제는 더이상 회피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회피할 수록 나의 상처 덩어리 판도라의 상자의 무게는 점점 무거워지면서 나의 삶을 지배한다.

쓸데없는 것들이라 생각했던 것들이 이제는 쓸데있는 것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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