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 술취한 신랑이 집에 들어왔는데 내 딸은 좋아했다.
그리고 딸은 술취한 아빠 대신 아빠의 옷들을 아주 즐겁고 유쾌하게 깔깔대며 기꺼이 벗겨주었다.
심지어 씻으라고 화장실까지 부축해서 데려다주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나는 신랑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오빠 좋겠다. 딸이 옷도 다 벗겨주고~
그 날은 정말 그런 생각에 그런 말을 하였다.
그리고 어느날 밤.
신랑이 늦은 시간까지 들어오지 않는 상황에 딸은 자꾸 아빠에게 전화를 해보라고 하였다.
사실 나는 신랑이 늦어도 전화 잘 안한다.
어련히 알아서 들어오겠지..
늦게 들어올만한 일이 있겠지..
암만 술자리에 오래 있어도 두 발로 걸어들어오고, 스스로 술이 떡이 되도록 먹지 않고 조절하는 사람인 것을 알기에 그러한 신뢰가 있다.
지난 10년동안의 결혼생활동안 신랑은 나의 이런 신뢰를 깨트린 적이 없다.
어젯밤 딸의 요청에 아빠에게 전화를 걸어주니 딸의 폭풍 잔소리가 시작됐다.
"아빠 어디야? 왜 여태 안와? 왜 맨날맨날 늦게 들어와? 아빠 술먹었어? 나 아빠 기다릴게~내가 이따가 또 옷 벗겨줄게~"
딸은 아주 천진난만하게 술이 취한거 같은 아빠의 목소리를 좋아했다.
그리고 설레이는 마음으로 아빠가 오기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아빠가 들어오니 기다렸다는듯이 아빠의 요구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옷을 벗겨주기 시작했다.
딸의 그런 모습에 신랑은 또 빙구마냥 좋아하며 히죽히죽 받아주었다.
그런 딸과 신랑의 모습이 어젯밤에는 왠지 모르게 내 마음을 스산하게 하였다.
어젯밤 나는 그 스산한 마음이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딸.. 너는 좋겠다..
나는 어린 딸에게 질투하고 있었다.
어린 나는 술취한 아빠가 질색이었는데 너는 좋아하는구나..
어린 나는 술취한 아빠가 안 들어오길 기다렸는데 너는 기다리는구나..
어린 나는 술취한 아빠가 들어오면 몇시간을 무릎을 꿇고 설교를 들었어야했는데 너는 안 그러는구나..
어린 나의 아빠는 늘 엄한 사람이었는데 니 아빠는 빙구같이 대해주기도 하는구나..
어린 나는 아빠한테 안겨본 기억이 없는데 너는 아빠가 부비부비도 잘해주고 자주 안아주는구나..
어린 나는 아빠와 함께 있는 시간이 너무 숨막혔는데 너는 아빠와 함께 하는 시간을 기다는구나..
어린 나는 엄마도 아빠도 늘 바라만 보는 사람이었는데 너는 아빠에게도 갔다가 엄마에게도 왔다가 하는구나..
어린 나는 아빠가 육아에 뒷전이었는데 너는 아빠가 머리도 묶어주고 너를 위한 밥도 자주 해주는구나..
그동안 깊게 느끼지 못했던 딸에 대한 질투가 어젯밤에는 물밀듯이 밀려와 나를 삼켰다.
나는 그러고보면 그동안 육아를 하면서 알게 모르게 딸에 대한 질투심이 차곡차곡 차올랐다.
어린 나는 그랬었는데 너는 아니잖아.
어린 나는 그게 결핍이었는데 너는 아니잖아.
어린 나는 불행했는데 너는 아니잖아.
내 마음 속에는 늘 어린 나와 내 딸에 대한 비교가 있었음을 그동안은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동안은 막연히 생각했던 딸에 대한 질투가 어젯밤 두 부녀의 모습을 통해 수면 위로 드러났다.
이젠 인정한다.
나는 딸에게 질투하는 엄마임을.
"딸
엄마 너 진짜 부러워.
엄마는 단 하루도 너처럼 아빠와 보내본 적이 없어. 엄마는 매일 밤 아빠가 술먹고 들어오면 어떡하나 늘 불안하고 무서워하면서 잤거든.
그리고 술취한 아빠 옆에는 엄마 발로 가본 적 없고 늘 아빠의 주정에 의해 끌려가본 경험만 있어.
엄마는 그러고만 살아봐도 너와 아빠의 모습을 볼 때마다 왠지 모를 감정이 들었었는데 이제 분명히 알았어.
엄마가 참 유치하고 찌질하게도 너에게 질투하고 있더라.
질투하지만 다행이기도 해. 엄마는 매일 밤 살얼음판에 놓인 기분으로 늘 공포에 떨고 살았는데 너는 그 공포 느끼지 않아서 다행이야.
그리고 니 아빠한테도 고마워졌어. 내 딸한테는 내가 느꼈던 공포 안 안겨줘서..
너 좋겠다. 엄마는 니 아빠같은 사람이 내 아빠였으면 했거든.
술마셔도 두발로 제대로 걸어들어오는.. 술마셔도 주정 안하고 그냥 자주는...지랄해도 때론 잘해주는..
엄마는 비록 엄마 아빠와 그런 추억이 없어 너를 질투했지만 이제는 질투하는 감정을 부인하지 않고 인정하고 엄마와는 다른 삶을 살아가는 너의 삶을 진심으로 축복할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