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이를 낳기 전 좋은 엄마를 꿈꾸었다.
나는 아이를 낳기 전 아주 이상적인 엄마를 꿈꾸었다.
그래서 다짐했었다.
'난 절대로 우리 엄마처럼은 안 키울꺼야...'
'난 기필코 내가 낳은 내 아이에게 사랑만 주는 엄마가 될거야'
그런 다짐은 내 아이가 돌쟁이 전쯤까지는 가능했던 것 같다.
수면부족한 상황에서 독박육아를 했어도, 그 경사 심한 아파트단지 가장 꼭대기동에 차없이 아기띠와 유모차로만 다녔어도 체력도 좋았고 아이를 바라보는 내 눈빛도 건강했다.
그 당시 알던 동네엄마들은 나에게 나를 보면 아이를 정말 사랑하는 눈빛이 느껴진다고 하였다.
나는 그 정도까지 의식하고 살지는 않았지만 정말 자연스러운 사랑의 꿀떨어지는 눈빛이 있었나보다.
나는 그 때까지만해도 나의 다짐이 제대로 먹힌 엄마노릇을 하고 있었다.
평생 그럴 줄 알았던 나는 내 아이가 돌쟁이가 넘어가면서 무너졌다.
나의 다짐과는 달리 내 엄마와 별반 다를거 없는 엄마의 모습이 보였다.
나의 다짐과는 달리 사랑보다는 상처를 주는 엄마의 모습이 보였다.
그런 나의 모습을 내가 느끼고 내가 직면하면서 좌절감과 죄책감이 나를 휘감았다.
그 모양 그 꼴로만 살고 싶지 않아서 어떻게 하면 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궁리하며 육아방법론을 찾아 헤맸다가 또 다시 좌절감과 죄책감에 나를 빠트리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머리로 아는 것과 가슴으로 아는 것의 천지차이
아무리 책을 읽어가면서 육아에 대해서 양육에 대해서 머리로 알아가도 가슴으로 느끼지 못하면 현실육아에서소용이 없었다.
나의 이상적인 엄마와 현실엄마의 간극 차이에서 수없이 고민하고 힘들어했다.
수없이 좌절했고 죄책감육아를 하였다.
사람은 자기가 가진 것만 타인에게 줄 수 있다는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육아를 통해 깨달았다.
내 안에 없는 사랑을 주는 것이 그렇게 힘든 것인지 육아를 통해 깨달았다.
없는 것을 배워서라도 쥐어짜서라도 주려는 것이 내면을 더 아프게 하는 것임을 육아를 통해 깨달았다.
이런 저런 일들로 마음까지 아파지면서 더 책을 부여잡았었고 심리상담을 받아가면서 나는 새로운 엄마설정을 하였었다.
그럭저럭 괜찮은 엄마라도
모든 엄마는 엄마라는 역할을 미리 공부하지 못한채 뭣모르고 어쩌다 엄마가 된다.
엄마라는 역할은 미리 공부한다고 더 잘할거라 장담할 수도 없다.
자신의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 비로소 자신의 상처받은 내면아이를 마주하게 되고 자신의 무의식을 들여다볼 기회가 생긴다.
어제의 엄마 역할도 처음, 오늘의 엄마 역할도 처음이다.
늘 눈뜨고 마주하는 지금 이 순간은 예행연습없이 마주하는 늘 '처음'이다.
늘 '처음'의 그 순간은 완벽할 수 없다. 완벽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지나친 기대와 욕심일 수 있다.
육아는 엄마도 사람이기에 늘 똑같을 수가 없음을 늘 완벽할 수 없는 존재임을 일찍감치 인정해야 조금은 수월해지는 긴 레이스여정이 되는 것 같다.
나는 그래서 늘 조금씩 내려놓는다.
완벽한 엄마에 대해서.
좋은 엄마에 대해서.
어제는 비록 악마같은 엄마이다가 오늘은 세상 천사같은 엄마로 빙의하더라도 나는 적어도 내 아이에게 그럭저럭 괜찮은 엄마라도 되고 싶다.
행복과 불행의 차이는 단 2%라고 한다.
양팔저울에서 행복이 49%, 불행이 51%이면 불행쪽으로 기운다.
양팔저울에서 행복이 51%, 불행이 49%이면 행복쪽으로 기운다.
그럭저럭 괜찮은 엄마라도 되어서 내 아이의 삶에 2%차이라도 행복을 더 주는 그럼 엄마가 되고 싶다.
내 아이가 한살한살 커갈수록 완벽한 엄마, 좋은 엄마는 더더더 내려놓게 되고 '그럭저럭 괜찮은 엄마'라고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게 된다.
하고싶다.
하고 싶다.
그럭저럭이라도 괜찮은 엄마.
적어도 내 아이가 생각하는 나란 엄마는 지랄맞았어도 그래도 종종 좋은 엄마였다고 회상되어지는 엄마, 노력했던 엄마가 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