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서 좀 본 분들이라면 빠지지 않고 보게 된 육아명언이 있을 것이다.
엄마가 행복해야
아이가 행복하다
난 봤어도 그동안 사실 크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었다.
난 불행해도 나만 애한테 잘하면 애는 행복하게 키울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이 또한 완전 경기도 오산이었지..
뱃속에 애를 엄마가 품고 있을 때야 탯줄로 연결이 되어있으니 충분히 그러하겠다 생각했지만 애가 내 뱃속에서 태어났을 때는 애와 나의 신체가 분리되어졌기에 정신도 분리될거라 생각했다.
내 삶은 행복과는 거리가 먼 삶이었다. 그래서 어떤게 행복한건지도 잘 몰랐다.
더 솔직히 말하면, 나에게는 행복보다는 불행이 더 익숙해서 행복하면 더 불안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애는 나와는 다르게 키워야한다는 일념하나로 육아를 책으로나마 배우고 애만은 행복하게 키우고 싶었다. 그래서 애만은 행복하게 키우려 애썼다.
희생이 다른게 희생이 아니다. 이런게 희생이다. 나는 뒷전으로 해둔채 애를 우선시해두고 사는거...무언가하는게 나를 위해서 하는거 없이, 애만을 위해 하는거...
난 이렇게 희생으로 애를 키웠다. 지난 나는 내가 희생해서 키우는건지도 몰랐다. 그게 당연한건지 알았다.
엄마라는 역할은 힘들어하면 안되는 줄 알았다. 그래서 힘들어도 힘든 표현을 드러내지 않고 육아를 했었다.
엄마라는 역할은 아파도 안되는 줄 알았다. 생각해보면 난 지난 9년의 육아를 되돌아보면 아파서 애를 신랑에게 맡기고 몇시간이라도 쉬어본 적이 거의 없다.
아무리 몸이 부서질 것 같이 힘들어도....함께 주말을 보내는 주말에 신랑은 자유로운 영혼으로 자고 싶을 때 낮이고 밤이고 잘 때 나의 힘듬을 내색해본 적도 없고, 나의 휴식시간을 당당히 요청해본 적도 없다.
애는 시시때때로 성장해나간다는 이유로, 애라는 이유로 그리 애 옷이며 뭐며 치장해주고, 난 낡아빠진 옷이나 입고, 나 뭐 살 돈으로 애하나 더 사주고 했다.
엄마라는 역할은 개인시간을 가지는 것은 사치가 생각했다. 그래서 애가 낮잠을 자는 시간에도 쉬기보다 뭐라도 하나 더 집안일을 하려고 바지런히 움직이곤 했다.
난 애 낮잠자는 시간에 같이 자거나 제대로 쉬어본 적이 거의 없다. 밤에 그렇게 악을 쓰고 울어재끼는 애와 씨름하느라 자는둥 마는둥 했어도, 애가 낮에 잘 때는 쉴 생각할 틈이 없이, 난장판인 집안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신랑은 자기가 돈버느라 일하고 퇴근했는데 퇴근 후 육아를 하거나, 살림까지 해야하냐며 이해할 수 없어 했다.
진짜 드럽고 치사해서 나도 나가서 돈벌고 싶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강하지 못한 모성애 신념으로 드럽고 치사했지만...난 희생하며 육아한 엄마였다.
난 지난 9년의 육아의 시간동안 몇 안되는 친구들과도 왕래를 거의 하지 않고 지냈다.
내가 친구들보다 결혼을 빨리해서 내가 한참 까꿍이 육아할 때 내 친구들은 한창 눈에 콩깍지가 씌인 연애들을 하고 있기도 했고, 내가 결혼과 동시에 타지에서 지내기도 했고.
혹여나 애를 신랑에게 맡기고 만날라고 쳐도 신랑은 기꺼이 다녀와라고 말하는 착한 넘은 아니었고, 애도 데리고 가라하는 썩을 넘이었다.
신랑이 애보기 싫어 일부러 그랬나??? 나도 내가 싫어하는 짓만 하는 신랑에게 애 맡기고 싶지 않았다.
그런 상황들이 쌓이고 쌓일 수록, 힘들고 미칠 것 같았지만...스스로 그런 나의 상태를 수용해주지 못하고 엄마라면 당연히 그래야만 하지 않을까?라는 잘못된 모성애의 신념이 문제였다.
육아 번아웃....
내가 건강하지 못한 모성애 신념으로 희생하는지도 모르고, 그리 버티고 버티다 난 육아 번아웃이 왔다.
혼자 그리 버티고 버티다 쓰러진 것이다.
난 사람이었는데 난 나를 신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사람이라면 혼자서 그리 버티는게 벅찬데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부정하고 나를 끄덕없는 철인으로 생각한 것이다.
난 철인도 신도 아닌, 지극히 사람다운 사람이었다. 난 결국 그렇게 육아번아웃으로 지쳐 쓰려졌다.
그러면서 애한테 짜증도 많이 냈고, 화도 많이 냈고, 그 이상 애를 쳐잡기도 많이 하는 괴물엄마가 되었다.
좋은 엄마되려 기를 쓰다 괴물엄마로 추락....ㅎㅎ
나에 대한 실망감, 좌절감, 수치심...이게 나를 덮쳤다.
누굴 탓하랴. 지난 모든 순간들의 선택은 잘못 주입된 모성애의 신념에 따른 나의 선택이었지.
어느날 아이의 맑을 두 눈을 바라보는데, 아이의 두 눈에 비친 내 모습이 굉장히 초췌해보이고, 세상 가장 불행한 여자로 보였다.
현타가 왔다.
어머..애 눈에 비친 내가 이렇다고?
그런 엄마를 바라보는 애는 과연 행복할까?
이걸 생각하니 억장이 무너졌다.
어린 나의 시절로 되돌아가 생각해보니, 어린 나의 행복도는 정말 아빠보다 엄마의 행복도에 비례했었다.
엄마책육아방에 참여하셨던 한 분도 어린시절 엄마가 흥얼거리며 설거지하시던 뒷모습에서 편안함을 느끼셨다고 하셨다.
아이들은 보통 아빠가 울면 따라 울지 않아도, 엄마가 울면 따라운다.
아이의 존재에 유전자적으로 아빠의 영향도 상당하지만, 아이는 이 지구에 태어나기 전부터 엄마의 뱃속에서 탯줄로 엄마와 함께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아무래도 아빠보다 엄마와 정서적으로 더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아이들은 아빠보다도 엄마의 정서적인 상태에 영향을 받는다.
사진 속 이 날은 내가 작년에 엄마책육아방의 남부방 식구들과 모임을 하고 돌아오던 날 찍은 날이었다.
이 날은 정확하게 아이가 언제 가장 행복하고 편안해보이는지를 알 수 있게 해주었다.
내 딸은 8살이 되도록, 엄마라는 나란 사람이 개인적으로 저렇게 꾸미고 개인적인 볼 일로 외출하는 걸 본 적이 없을 것이다. 아마도 저 날이 처음이었다.
처음으로 애를 신랑에게 맡기고, 1박 2일의 일정으로 나의 개인적인 볼일을 보았고, 생각지도 않게 엄마책육아방에 참여하신 한 분이 나에게 저 옷을 선물해주고,,저렇게 화장까지 해주었지.
내가 외출할 때 모습과 돌아왔을 때 완전 다른 사람으로 변해왔었다.
돌아온 나의 모습을 보았던 아이의 말과 눈빛이 아직도 기억난다.
엄마 이쁘다~
엄마 매일 이렇게 하고 다녀~
애가 나를 바라보는 눈빛부터가 편안해보이고 하트뽕뽕. 엄마를 이리보고 저리보고 신기해함.
왠지 모르게 애가 정서적으로 굉장히 편안해보였다. 잊을만하면 지랄발광하던 애가 그날은 유난히 평온해보이고 협조적이었다.
그리고 뼈져리게 깨달았다.
아... 희생하는 엄마는 좋은 엄마 아니다.
희생하는 엄마는 아이의 숨통을 쪼인다는 걸...
진짜 좋은 엄마는 희생하는게 아닌, 가장 나다운 엄마의 모습을 잃지 않고, 가장 나다운 엄마의 삶을 보여주는 엄마였다.
저날 내 딸이 왜 저렇게 편안하게 느껴졌다 생각해보면 나도 저 때 뭔가 충만하고 행복했다.
집구석에서 24시간 365일 8년간 애만 보다가 아내, 엄마, 주부 딱지 떼고, 가장 나다운 모습으로 시간을 보내고 왔으니 얼마나 숨통이 틔였을까..
이게 뭐라고...난 8년간 무슨 올드보이마냥 살아온건지...
나의 잘못된 모성애 신념에 따른 희생은 애를 위할 수 없는거였다. 정작 애를 위한답시고 했던 지난 희생하는 육아는 애한테 개코도 행복을 느낄 수 없게 해주는거였다.
희생하는 육아는 애도 엄마도 나락으로 떨어지는 육아였다.
전업맘이고 워킹맘인게 중요한게 아니라, 엄마가 전업맘이여도 워킹맘이여도 엄마가 자신의 삶에서 가장 나다운 모습을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한거였다.
가장 나다운 모습으로 존재할 수 있는 시간들을 갖는 엄마의 삶을 보여주는 엄마가 이기적이고 모성애가 없는 엄마가 아니라, 이것이 진정으로 애를 위한 길이었다.
만약 가족 구성원을 비롯해, 주변에서 엄마의 나다움을 밟아대며 희생을 조종하는 사람들은 그 집 아이 불행해지라 비는 꼴이다.
엄마가 불행한데, 행복한 아이는 없다. 육아라는 세계에 변하지 않는 진리는 아이의 행복은 엄마의 행복과 긴밀하게 연결되어있다는 것이다.
8년동안 희생하는지도 모르고 희생하며 해오던 육아에서 이런 현타를 느낀 나란 엄마도 숙제이다.
내가 무엇을 할 때 행복한지.
내가 가장 나다워질 때가 언제인지
이게 애를 위해 하는건지, 나를 위해 하는건지..
나도 여전히 가장 나다움을 잃지 않는 엄마의 모습을 보여주는게 쉽지 않아 연습하는 중이다.
더이상 애 눈에 비친 나란 엄마의 모습이 초췌하고 세상 불행해보이는 엄마가 아니라, 앞으로는 행복한 엄마로 비춰지면 좋겠다.
이게 내가 내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정서적 유산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