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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목석 Feb 24. 2024

비 오는 날 비자림을 걸었습니다

두 갈래 길에서 용기를 내어

빗소리를 듣는 것은 좋아하지만

비 맞는 것은 싫어한다

방관하는 것은 나의 몫이며

행동하는 자는 언제나 따로 있었다


제주는 일주일 내내 비가 내렸다

바람까지 불던 토요일 오후 비자림을 걸었다

로버트 프로스트가 만났을 법한

두 갈래 길이 있었고

평소처럼 먼저 출구를 찾았다


비옷을 입은 노랗고 희뿌연 사람들은

이미 저만치 가버렸고

우산을 쥔 왼손은 차가워지고

성치 않는 왼쪽 가슴 언저리는 따끔거렸다


나가는 곳 팻말을 보았고

무심코 그곳으로 발길을 옮겼다

열 발자국 갔을까 오늘따라 웬일인지

오솔길 입구를 가볼까 용기가 생겼다

누구도 의식하지 않고 다시 걸어볼 배짱이 생겼다


나를 기다려도

아니 기다리지 않아도 상관치 않고

가야겠다

아니 가보겠다 마음먹었다


물웅덩이에

진흙탕에

자갈밭을

가만 사뿐 걸어

천년 된 비자나무 앞에 섰다


너를 보러 온 거니

너를 보는 나를 보러 온 거니


결국

삶의 길에서

이탈하지 않았고

사람들을 만났고

함께 웃었고

같이 걸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빗소리에 맞춰

2/4박자가 아닌

4/4박자로 걸었다


툭. 툭. 툭. 툭.


오랜만에 찾은 나다운 속도에

가뿐 숨이 천천히 뿜어졌다


구멍 난 가슴이 비자 향기로 가득 메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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