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 머뭇거린다. 공무원이라는 직업이 부끄럽지는 않다. 10여 년을 근무해 보니 그다지 자랑스럽지도 않기 때문이다. 결혼 후에도 친정엄마에게 내 월급으로 생활비를 드리고 싶었다. 프리랜서인 남편의 불안정한 직업이 장기 연애하는 동안 내내 마음에 걸렸다.
가족 때문에 억지로 직장을 다닌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전업맘인 친구를 속으로 부러워한 적도 많았다. 유방암 진단을 받고도 회사를 나가야 하는 상황이 서글펐고 이상이 아닌 생업을 위해 일한다는 것이 한때는 죽을 만큼 싫었다.
남들처럼 파이어(fire)를 외치며 퇴직하고 새로운 길을 만들어 성공하고 싶었다. 돈과 명예를 얻고 싶었다. 새벽 기상을 하고 부동산 공부를 시작했다. 게으른 데다 포기는 밥 먹듯이 하고 자기 합리화만 해대는 나 자신이 더욱 싫어졌다. 모든 것이 억지스럽고 무리였다.
일 처리 속도가 느리고 재차 확인하는 강박이 심하다 보니 직장에서도 야근을 달고 살았다. 통화 중인 동료의 수화기 너머 상대방 목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예민해지자 공황 증상이 나타났다. 평소 자주 가는 카페에서 순간 어지럽고 메슥거리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몇 달 뒤 홀로 야근하는 사무실에서 찾아온 자살 충동에 바로 정신건강의학과를 예약했다. 약에 대한 부작용도 겪었다. 잠이 쏟아지고 지각몽을 꾸었다. 그래도 꾸준히 먹었다. 다시는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싶지 않았다. 절실히 살고 싶었다.
번아웃을 심하게 겪은 후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그리 좋아하던 책도 읽지 않았다. 사람들도 만나지 않았다. 평소 시간 낭비라 여겼던 영화나 드라마만 아무 생각 없이 보았다.
저는 사실 남들 기준에 맞춰서 살다 병이 났어요. 남들은 다 잘한다고 생각하고 저만 못한다고 생각해서 힘들었거든요. 그래서 지금은 그냥 남 말고 저랑 친해지는 중이에요.
드라마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중 주인공의 대사가 딱 내 마음 같았다. 나랑 가장 친해져야 한다는 것을 잊고 살았다. 노트북을 켰다. 오랜만에 SNS에 접속했다. 기억나는 책 구절을 두 어 문장 적고 마음속 이야기를 썼다. 책과 관련 없는 이야기였다. 그래도 좋았다. 그저 내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거다. 사람들의 반응은 상관없었다. 고향인 강릉에서 보냈던 고3 시절 야간자율학습 시간에 몰래 나와 동해 바다 앞에 서 있던 때가 떠올랐다. 돌덩이 같던 가슴이 가벼워지고 눈과 코, 귀 온몸의 구멍들이 뻥 뚫리는 느낌이었다. 속이 다 시원했다.
마음 단단히 먹고 휴직도 했다. 승진도 하고 한창 일해야 할 나이라지만 사람들의 평가를 등지고 살아야겠다는 마음뿐이었다. 줄어든 월급에 빠듯한 생활은 다행히 남편이 프리랜서로 이런저런 일을 맡았다. 덕분에 직장 다니며 소홀했던 살림을 도맡았다. 평소에는 건조기에 대충 구겨 넣어 버리던 빨래도 햇살 좋은 날 각 잡아 건조대에 널었다, 편의점 간편식이나 배달앱을 주로 이용하던 습관을 버리고 백종원 레시피를 찾으며 다양한 종류의 떡볶이를 시도해 보았다. 직장일 만큼 집안일도 소중하고 가치 있는 일이었다. 머리 식힐 겸 글 쓰러 간다고 빨래며 설거지고 미뤄두고 카페로 줄행랑치던 과거가 떠올랐다.
생활 글쓰기를 시작했다. 베란다에서 빨래 널다 바깥에서 들리는 이웃들의 대화 소리에 귀 기울이며 소재를 찾았다. 식사 준비를 하며 음식의 재료와 순서가 중요하듯 글을 쓸 때도 글감과 과정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찮게 여긴 것들이 실은 꼭 필요하단 것을 쉬는 동안 알았다. 아이들을 다 키우고 난 후 쉰 살 이후 작가로 등단하신 박완서 작가, 부엌 식탁에서 글을 쓰는 김애란 작가, 시크하고 도도해 보이지만 종종 딸과의 데이트 사진을 SNS에 올리는 임경선 작가. 여자이자 엄마라서 더 다채로운 이야기를 쓸 수 있다.
물론 지금도 죽기 전까지 계속하고 싶은 단 하나는 바로 쓰는 것이다. 쓰다 보니 나와 친해지고 나를 좋아하게 되니 세상이 달라 보이기 때문이다. 글 속에서는 가면을 벗고 비로소 진정한 나를 알게 되니 이보다 좋지 아니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