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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슉 May 29. 2020

쇼핑리스트

새언니와 나의 쇼핑리스트

새언니와 나는 1살 차이다. 


승현이와 셋이서 외출을 할 때면 모두 나를 승현이 ‘이모’라고 생각한다. 그도 그럴 것이 나이도 비슷하고 쇼핑도 같이 다니며 허물없이 이야기하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즘에는 코로나19로 밖을 자유롭게 다니지 못하니 스트레스가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다. 이럴 때는 인터넷 쇼핑이 답이지! 주말에는 어느 샌가 휴대폰으로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이 인터넷 쇼핑을 한다. 물론 좋은 물건이 있나 ‘둘러보고’, 정보를 ‘공유하는’ 시간이 더 많지만, 어느 날은 나도 모르게 ‘구매’버튼을 누르고 있는 나를 발견하기도 한다. 


비는 오락가락하고 공기는 눅눅해서 집 안에서도 움직이기 귀찮은 어느 주말 오후였다. 그날 우리 둘에게 갑자기 지름신이 찾아오셔서, 그동안 눈으로만 쇼핑하던 새언니와 나는 무언가를 사재꼈다. 쉴 새없이 휴대폰 화면을 터치하는 동작만 반복했다.   


“아. 스트레스 받아서 막 샀어. 집에 세제랑 티슈랑 떨어져가서, 아직 남았는데 그냥 쟁여놓는다는 생각으로 막 사버렸어. 주방세제도 조금 남았는데 그냥 살까봐.”

“그래요? 필요하면 사둬요. 어차피 계속 쓸 건데. 가격 저렴할 때 사두면 좋지.”     


10년차 주부인 새언니의 지름신은 주로 살림살이 분야로 강림하시나보다. 새언니가 ‘스트레스 받아서 막 산’ 물건들은 세제와 휴지였다. 이 외에도 새언니가 지르는 것들은 요리할 때 필요한 주방용품, 땀이 유난히 많은 승현이 여름바지와 티셔츠, 양말 한 무더기 등 대부분 가족을 위한 것들이다. 나와는 1살 차이인데 바라보는 세상이 너무 다르다. 챙겨야 할 아이와 남편이 없는 나에게 지름신은 주로 생존과 직결되지 않은 것들에 찾아온다. 한 번 해보고 싶어서 사는 액세서리, 여름이 다가오니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반팔 티셔츠들, 그래도 출근할 때는 막 입을 수 없으니 장만하는 반팔 블라우스, 몇 달 전부터 찜 해놓은 신발 등등 오롯이 나만을 위한 것들 뿐이다.     

 

새언니는 사은품을 받아올 때도 살림살이를 골라온다. 


언니의 쇼핑리스트를 보고난 후 왠지 모르게 부끄러워졌다. 내 쇼핑목록에는 이 나이가 되도록 주변을 돌아보기 보다는 아직도 내 중심으로만 생각하는 나의 좁은 세계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나는 아직도 나만을 위해 세상을 살아가고 있었다.      

최근, 나이라는 숫자를 자주 들춰본다.


막 30살이 되었을 때 40대가 되면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40살이 되려면 아직도 많은 날들이 남아있던 시기였기에, 그 말은 나에게 30대를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고민하게 하는 지표가 되었다. 그때 나는 주변의 여러 선배들을 보며 많은 다짐을 반복하곤 했다.      


40년 하고도 몇 년을 더 지낸 지금, 나는 어떤 표정을 가진 사람이 되었을까. 40대에 갖춰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30살의 내가 원했던 40대의 내 모습은 어떤 것이었을까? 일반적으로 40대는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어느 정도의 성과와 안정감을 갖춘 모습을 생각하곤 한다. 물론 나도 내가 40살이 넘으면 학문적으로, 사회적으로 성취를 할 것이며, 개인으로서는 가정을 이루고 소소한 행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모습일 것이라 생각했다. 소위 아파트 광고에 나오는 더할나위 없이 행복한 사람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쇼핑목록만 보자면, 나는 아직 나이에 맞지 않는 모습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나의 삶과 확연히 비교되는 주변의 비슷한 나이대 사람들의 삶을 보면 이러한 나의 생각은 확신으로 바뀐다. 여유있는 그들의 행동과 말투, 재력에 나는 주눅이 들곤 했다. 이렇게 보면 ‘나이대에 맞는’ 일, 행동, 말투, 경력, 재산들을 갖추어 가며 나이에 걸맞은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 나에게는 불가능해 보인다.      


타인들과 나를 비교하며 내가 생각해왔던 ‘평범한’ 삶을 사는 그들이 그렇게도 부러웠다. 나에게는 왜 그런 평범한 행복을 주지 않느냐며 신을 원망하던 날들도 수없이 많았다. 마치 신이 나에게 벌을 주는 것처럼 느끼던 때도 있었다. 나는 나름대로 치열하게, 쉼 없이 20대와 30대를 살아왔다고 자부했다. 그런데 지금의 모습이 내가 원하던 40대의 모습이 아니었기에 나의 현재를 미워하고 거부한 적이 있었다. 미래가 암담하다고 혼자서 그렇게 결론을 내려버리기도 했다.     


그런데 내가 생각한 내 나이대에 갖춰야 할 모습들은 어찌보면 내가 ‘만들어낸 기준’이었다. 내 스스로 타인의 시점에서 나를 재단하고 있었다. 내가 만들어낸 기준에 맞지 않는다고, 남들과 같은 모습을 갖추지 못했다고 자신을 비하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생각들로 괴로워한들 나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고, 지금 당장 가정을 꾸리거나 집과 차를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내가 다른 사람이 될 수는 없다.’ 내가 생각했던 40대의 모습을 갖춘 그 사람들이 아무리 되고 싶어도 내가 그 사람이 될 수는 없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생각해보니, 내가 원하던 것은 겉으로 치장한 내 모습이 아니라 ‘성숙한’ 어른의 표정이었다. 내 쇼핑리스트의 품목들처럼 나만의 세상 속에서 혼자 살아가는 편협한 모습은 아닐까. 혹은 내가 옳다는 아집으로 똘똘 뭉쳐있는 뚱한 표정은 아닐까. 다른 사람은 다가올 수 없는 차가운 시선을 가진 것은 아닐까. 새언니의 쇼핑 목록을 보면서 들었던 부끄러움은 나만을 생각하며 오랜 시간 살아온 내가 나도 모르게 이런 표정을 가진 사람이 된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 때문이었던 듯하다.     

 

몇 년 전 일본 여행에서는 가족의 선물도 채워보았다.


오늘의 시간도 미래의 나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다. 그렇기에 내가 원했던 내 얼굴의 표정을 만들어 가는 것을 멈춰서는 안 된다. 지금의 나이에 좌절하기 보다는 남은 시간동안 내 얼굴의 표정을 만들어가며 살아가면 된다. 눈에 보이는 기준들에 집착하지 말고 앞으로 내 얼굴을 만들어가는 것들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아야겠다. 다른 사람에 대한 포용력, 사회를 바라보는 냉철한 시선, 다름을 인정하는 것, 시대에 뒤처지지 않는 끊임없는 관심과 같은 것들을 어떻게 내 것으로 만들 것인가에 대한 고민과 실천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제껏 새언니의 지름신은 모두 가족을 위한 것들만 사들이게 했으니, 나에게 다음에 지름신이 찾아올 때는 새언니 것도 곁들여서 사들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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