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글을 쓰는 10가지 이유
내가 글을 쓰는 이유_글쓰기가 나에게 가진 의미
초등학생이었을 때 방학마다 나를 괴롭히던 것은 방학숙제... 꼭 개학을 며칠 앞두고서야 방학숙제를 벼락치기로 해치워버리곤 했다. 그렇게 꾸역꾸역 해치워버리던 숙제 더미 중에서 가장 곤란한 것이 일기 쓰기였다. 무엇보다 날씨를 써야 한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그날그날의 날씨를 기록해두지 않고 지어내서 쓰면 금방 들통날 것이기 때문이다. 날씨의 관문을 넘고 나면 그다음에 나를 기다리는 것은 일기장의 황량한 빈칸이었다. 적어도 ‘5줄’은 채워야 그나마 덜 벼락치기 같이 보일 것 같아서 5줄이라도 채우기 위해 매일의 에피소드들을 쥐어짜고 지어내서, 그것을 크게 부풀려 억지로 빈칸을 채웠다. 이렇게 나에게 글쓰기는 벼락치기 방학숙제의 기억과 함께 버무려져 있다.
초등학생 시절, 누구나 한 번쯤은 글짓기 혹은 그리기로 상을 받아보았을 것이다. 나는 그리기 재주와는 거리가 태양과 명왕성만큼이나 멀어 가망이 없고, 그나마 글짓기로 상을 받아보았다. 물론 그리 큰 상이 아니었으니 지금 나의 기억 속에도 큰 자리를 차지하지 않는 것이겠지만, 나도 나름 글짓기 상을 받아보았다. 아마도 초등학교 1학년 때였던 것 같고, 그리고 그 상이 내가 처음으로 받은 상이었던 것 같다. 나름 상장에 무늬도 화려하고 크기도 꽤 커서 오랫동안 부모님이 간직하셨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초등학교 5학년 때는 숙제로 제출했던 글짓기 결과물이 나름 반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혀 교실 뒤의 뽐내기 게시판에 게시되기도 했다. 조용하고 다정다감하신 담임 선생님께서 내 글의 특정 문장에 직접 빨간 색연필로 줄을 긋고 “정말 지나가는 나무들이 눈에 보이는 듯하구나. 표현이 정말 좋다.”라고 칭찬의 글을 써주셨다.
이렇듯 나도 글쓰기로 칭찬을 받아본 여자다.
어른이 되어 학업에 매달렸을 때, 글쓰기는 나의 생각을 담아 논리를 펼쳐 보이며 남들에게 나를 뽐내는 도구로 작동하기도 했다. 전공 관련 학술지에 제출하기 위해 혹은 한 학기 끝의 과제로서 A4 10장 이상을 까만 글자로 빽빽이 채워나갈 때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다. 하지만 글쓰기는 이러한 고통을 상쇄할 만큼의 잘난 척이라는 보상이 뒤따르기에 고통을 감내할 가치가 있었다. 내 감정과 생각을 담아 글로 표현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준다는 것이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몸소 체험하며 깨달아가던 시간이었다.
그런 시간들이 지속되면서 글쓰기를 해야 한다는 압박감, 다른 사람의 결과물에 비해 초라한 나의 결과물 그리고 그 정도밖에 안 되는 나에 대한 실망감으로 서서히 지쳐가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내 생각을 완전히 이해하고 공감하지 못하는 타인들에게 평가를 당하는 것이 힘겹고 두려워졌다. 나보다 잘났다는 자만으로 가득 찬 사람들 앞에서 오롯이 나를 이해해주고 동조해주는 사람은 찾을 수 없었다. 나의 당락을 결정할 수 있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쥔 자들에게 나는 그들이 쥐고 있는 잣대로 거침없이 재단당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벌거벗은 채로 그들 앞에 서 있는 것 같았다. 굴욕감과 함께 글쓰기의 즐거움은 잊히고 온통 ‘해야 한다’는 목적 없는 당위성만 남게 되었다. 글쓰기의 즐거움을 느끼기보다는 지적 허영심을 채우는데 치중하다 내 발에 걸려 넘어진 꼴이 되었다.
오랜 학업기간 동안 나에게 글쓰기는 그렇게 이중인격을 가진 친구가 되었다.
이렇듯 글쓰기의 역효과에 시달리던 나는, 그만 쓰는 것을 중단하게 되었다. 좀 더 엄밀히 말하자면 지식을 쌓아가고 그것을 꾹꾹 눌러 담아 타인에게 평가당하고, 자랑하는 글쓰기가 너무 버거워졌다. 글쓰기와의 기싸움에 밀렸다고나 할까.
그러는 동안에 세상은 변해서 평범한 사람들이 자신의 인생을 글로 쓰고 책으로 만들고 만족을 만들어가는 시절이 되었다. 각자 자기 인생의 자서전 만들기가 버킷리스트라는 말을 왕왕 듣곤 한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라고 생각해왔다. 한동안 나에게 책은 전공 관련 책들만 보아왔기에 조금은 질려있었던 관계로 책을 쓴다거나 글을 쓴다는 것은 엄두가 나지 않는 행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글쓰기에 대한 열망이 웅크리고 있었나 보다. 감정적으로 지쳐있을 때 아주 우연히 읽은 에세이에 위로받고 공감하며, ‘쉽고 재밌지만 가볍지 않은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조금 더 적나라하게 고백하자면, 그 생각이 불현듯 나를 찾아와 뒤통수를 후려갈겨서 당장이라도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은 조바심이 들었다. 그동안 숨죽여 지내던 글쓰기에 대한 갈증과 꿈이 새로운 나를 만들고 싶다는 도전정신과 어우러져 나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글쓰기는 나에게 새로운 도전이 되었다. 이전의 글쓰기와는 다른 온전히 나를 바라보는 글쓰기를 하고 싶었다.
나의 시간들을 돌아보고 나를 들여다보는 글을 쓰다 보니, 의도치 않게 그 결과물은 반성문이 되어있었다. 나도 모르게 길다면 길었던 나의 시간들에 대한 반성문을 쓰고 있었다. 나 자신을 아끼지 못했음에 대한 미안함, 그때의 시간을 소중히 여기지 못했음에 대한 미안함, 부모님께 한마디라도 더 살갑게 하지 못했음에 대한 미안함 등등 나와 내 주변, 이제는 만날 수 없는 지난 시간과 지난 사람들에 대한 미안함이 떠올랐다. 동시에 내가 했던 선택에 대한 후회와 미련을 발견하고는 수없이 많은 ‘만약에’를 떠올리기도 했다. 그때 그 회사를 계속 다녔어야 했는데, 공부를 다시 시작하지 않았다면, 혹은 그때 그 사람과 연락을 계속했다면 등등 많은 후회에서 비롯된 이루어질 수 없는 가정을 되뇌고 있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후회와 미련은 해봤자 소용이 없었고, 속으로 되뇌었던 많은 ‘만약에’는 헛된 생각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글쓰기를 하면서 나는 ‘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는 그 흔한 명제를 몸소 체험하고 있었다.
그런 시간들 속에서 나조차도 외면하고 싶었던 나의 시간들을 어쩔 수 없이 다시 끄집어내어 마주하게 되었다. 기억에서 지우고 싶었던, 너무 아파서 혹은 창피해서 외면해왔던 ‘점’이었지만, 그런 ‘점’들이 모여 내 인생의 타임라인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렇게 나의 반성문은 계속되었고, 앞으로도 외면하고 싶은 '점'들과 반성문은 계속해서 튀어나오게 되겠지.
글쓰기인지 반성문인지 혼돈의 시간을 보내면서 나도 모르게 치유의 첫 단추를 끼울 수 있게 되었다. 나조차도 외면하고 싶었던 시간들을 꺼내어보고 들여다보고 반성을 하면서 혹은 다시 한번 시원하게 욕을 하면서 그 기억을 꺼내는 것이 조금씩 어렵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반성하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맺히는 경험을 하게 되었고, 그 눈물로 인해 나 자신을 다독일 수 있게 된 것 같다. 나의 감정을 돌아보고 보듬으며 다 나았다고 외면했지만, 아직도 딱지가 아물지 않았던 그 상처에 다시 연고를 바를 수 있었다.
내 시간을 좀 더 잘게 쪼개서 꺼내볼 수 있게 되었고, 순간순간에 대한 감정들이 떠오르게 되었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현재의 시간들 속에서 스쳐 지나가는 작은 말들, 작은 점들도 놓치지 않고 감정을 불어넣는 연습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기에 외로움도 좋은 글감이 되는 현상을 경험할 수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외로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만..)
빈 여백을 까만색 글자로 채워나갈 때의 기분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여백을 오롯에 내 언어로 채워나가는 과정은 무척 힘들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재미가 있다. 안마를 받을 때 아픈데 시원한 것처럼 글을 써 내려갈 때 지치지만 아무것도 없는 것에 무언가를 쌓아나가는 것에 대한 재미가 있다. 지난번 글보다 길게, 내 감정을 잘 전달할 수 있도록 좀 더 자세하게, 내용을 더 풍부하게... 이런 생각으로 빈 공간을 지금도 채워나가고 있다.
글을 써 내려가는 것도 재미가 있지만, 그에 못지않게 내 글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는 것의 재미도 크다. 떨리고 부끄럽지만, 그리고 그들의 평가가 무섭기도 하지만 나를 드러내 놓은 글을 함께 보고 따스한 이야기를 주고받는 순간들이 즐겁다.
글쓰기는 참 재미가 있다. 단순한 말이지만 글쓰기를 설명할 때 이 표현이 내가 생각하는 가장 적합한 표현이다.
글쓰기는 참 재미가 있다.
글쓰기에 대한 재미를 붙여나가다 보면 어느새 내가 쓴 글이 쌓이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눈 앞에 글쓰기의 결과물들이 적나라하게 보인다. 그리고 글쓰기 연습에 시간을 들인 만큼 조금씩 변화하는 내 글을 보게 된다. 처음에는 두서없이 쓰는데도 한 페이지를 넘기기 어려웠는데, 글쓰기 연습 몇 번 했다고, 그나마 두서가 조금은 있게 되고, 분량도 서서히 늘어나고 있었다. 이것은 타인이 나에게 변화를 알려주는 것이 아니고 내가 직접 느끼고 보게 되는 변화이기에 더 생생하게 다가온다. 그리고 그것은 나에게 성취감을 준다. 나에게 굴욕감을 주었던 글쓰기가 성취감으로 뒤바뀌는 놀라운 현상이 일어난다. 오랜 기간 글쓰기를 해온 사람들이 보기에는 아직도 갈길이 멀게 느껴질 결과물이겠지만, 글쓰기를 통해 굴욕감을 느꼈던 나로서는 이만큼 온 것에 스스로 대견함을 느낀다. 자화자찬이라고 비웃어도 어쩔 수 없다.
지금 나는 몇 달 동안 쓰고 모아 온 내 글이 소중하고, 그 중에서도 치열하게 연습했던 한 달 남짓의 시간 동안 일어난 변화가 신기하고 소중할 따름이다.
‘혹시 내가??’
글쓰기를 계속하다 보면 글쓰기로 인해 내 삶이 변화할 수 있지 않을까? 혹시 내가 전문작가가 되어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글쓰기의 목적이 전문작가로 성공하는 것이라고 설정하진 않았지만, 인생을 알 수 없는 일들로 가득 차 있으니까 그 어느 것도 장담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지금 걸음마를 뗀 재미있는 글쓰기가 앞으로 어디로 달려갈지, 어느 지점으로 골인할지는 나도 알 수 없다. 지금은 김칫국 한 사발 감이라는 생각들이 나중에 현실이 되어 있을지, 그대로 김칫국으로 남아있을지는 모를 일이다. 하지만 내가 멈추지 않는다면, 지금의 글쓰기는 나를 어디로든 데려갈 것이고 그곳은 내 삶에서 지금껏 가보지 못한 곳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나에게 재미와 성취감을 주고 있는 글쓰기가 앞으로도 나에게 계속 즐거운 경험과 좋은 결과만을 가져다주진 않겠지만, 그것으로 인해 내 시간들이 또 알차게 채워질 것임은 틀림이 없다.
나의 변화된 시간에 대한 그리고 앞으로 채워질 내 삶에 대한 희망을 품어볼 수 있게 되었다.
지금의 글쓰기는 훗날 내가 이 세상에 살았었다는 흔적이다. 시대를 흔들었던 위인이 아닐지라도, 시대에 적응하며 혹은 앞서가기 위해 치열하게 움직였던 개인의 모습이 있기에 이 세상이 굴러간다. 개개인이 모여 세상을 이루고, 세상을 움직인다. 그렇기에 그 개인들의 시간은 모두 가치가 있다.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꽉꽉 채워나가려 허둥거렸던 나도 세상에 흔적을 남길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 소풍처럼 두근거리고 즐거움으로 가득 찬 순간뿐만 아니라 몸에 좋은 약처럼 쓰디쓴 순간들도 내 인생의 소중한 시간들이다. 그런 점들이 다 모여야 '나'라는 사람의 시간을 모아볼 수 있다.
나의 흔적을 남길 수 있는 방법으로 내가 선택한 것이 바로 글쓰기이다. 이런 거창한 생각이 글쓰기 연습을 다시 시작할 때부터 함께 한 것은 아니지만, 몇 개 저장해놓은 글쓰기 결과물을 보면 이 생각이 맞다. 지금까지의 흔적을 더듬어서 모아놓은 것들과 앞으로 채워나갈 나의 시간들을 함께 버무리면 그것이 곧 내 시간들에 대한 타임캡슐이 된다.
나름의 치열한 시간을 보냈다는 내 삶의 흔적이 되어줄 것이기에, 앞으로도 계속 글쓰기를 즐거워하려 한다.
브런치에 발행하는 첫 글을 무엇으로 할까 하루 동안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첫'이라는 단어에는 설렘과 부담감이 공존한다.
처음으로 나의 어떤 모습을 보여줄까에 대한 고민을 하다가
'아.. 내가 무슨 유명 작가도 아니고, 이런 김칫국을 마시고 있담!'
이런 생각이 퍼뜩 들어 정신을 차렸다.
그래.. 그 '첫'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다른 사람이 아닌 나에게 부여하자.
나의 이야기를 쓰고 남기자.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또 나에게 공감해줄 수 있는 넓은 아량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게 되겠지.
그래서 결론은 브런치를 대하는 나의 마음가짐을 다잡는 의미에서
'글쓰기가 나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를 선정했다. (나름 내 안에 있는 여럿의 자아가 치열한 심사를 했다.)
언젠가 글쓰기에 대한 재미가 시들해지거나 너무 익숙해져서 게으름에 빠질 때
이 글을 또 꺼내어 곱씹어 볼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