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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미니마니모 Dec 12. 2019

먼지, 신의, 그리고 독립출판

소설처럼 쓰려고 해 본 에세이

 뿌옇고 짙게 깔린 먼지 속을 헤쳐 나가면서 지나는 사람들이 모두 먼지같다는 생각. 먼지를 셀 수 있다면 딱 온 세상의 사람 수 정도이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다보면 나도 먼지일 테니까 그러면 먼지만도 못하거나 낫다는 표현이 무색하게 그냥 모든 것이 먼지이고 인간이 하는 어떤 것도 무용해질 것인데, 나는 그래도 생각이란 것을 하고 있으니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존재한다고 해서 먼지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면, 모두가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니까 생각하지 않고 존재하는 사람들은 그야말로 먼지인 것인가. 


 점점 먼지와 한 몸이 되어가면서, 지하철에서 본 휠체어를 탄 소년이 떠올랐다. 휠체어를 타고 있다는 것 이외에는 별다를 것 없어 보이는 사람이었고, 그 역시 다른 모두와 마찬가지로 네모낳고 검은 화면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이따금 손가락을 따라하기 어렵게 구부리긴 했지만 네모난 화면을 이동하기 위함이었고 그렇게 이상하다고 말할 만큼의 무언가는 있지 않았다. 무심코 시선을 그에게 고정했다가 입인지 코인지 어딘가에서 흘러나오는 하얀 액체를 보았다. 액체라고 하는 것이 맞는 것일까. 좀더 끈적한 무엇일지도 몰랐지만 일단은 한 방울,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동시에 같은 곳에 시선을 공유하던 바로 앞의 아주머니와 눈을 마주쳤고, 그제야 같은 곳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시간은 고요하게 흘러갔고 내릴 때가 되어 우연하게 휠체어에 탄 소년과 함께 내렸다. 사실 그를 쳐다보고 있던 것은 우리만이 아니었다. 힐끔거리며 조용하게 오가던 시선들은 조용한 공기 속에서도 시끄럽게 속닥거렸다. 먼지와 사람, 생각과 존재, 그리고 그를 바라보던 시선들은 다 무엇인가. 그것은 모두 다 무용한 것이었을까. 


 왜, 혹은 질문을 달고 사는 사람들이 창의적인 생각을 한다, 무언가 대단한 것을 하고 말 것이라고 말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왜냐하면 내가 바로 그러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이렇게 생각 속에 잠겨서 밀려오는 생각들을 또 바라만 보다가, 또 한 번 잠기고 잠기고 잠기다가, 결국은 일어서지 못한 서퍼처럼 줄이 발목에 감겨 깊은 물 속으로 들어가고 마니까. 






 독립출판을 하고 있다고, 사람들에게 자랑스레 말하면서도 마음 한 편에는 불안이 자리하고 있었다. 불안은 내가 잘 모르는 분야를 시작할 때 생기는 것인데 마냥 어두운 것만은 아니었다. 내가 이것을 해내고 나면 이것도 해냈다고 자부심을 가질 만한 어느 뿌듯함이 보장되는 불안이었다. 그렇기에 조심스러우면서도 조심스럽다고 하기에는 조금 부주의한 상태로 말을 했었다. 좋아하는 지인들에게만 말했다고 하기에도 좋아하는 지인들이 많았기에 어느덧 나도 모르게 많이 알려진 터였고, 텀블벅이라는 유명한 펀딩 사이트에서 오픈을 하고 지인의 지인들에까지 전파한 덕에 처음 예상보다 큰 규모가 되어버렸다.

 

 텀블벅 펀딩을 한 것은 나 자신의 역량을 시험하기 위함이었다. 내 이름을 걸고 직접 상세페이지를 만들고 돈과 사람을 써서 보다 완벽한 책을 만드는 것. 처음엔 시간이 있으니 괜찮겠지 생각하며 가볍게 시작했지만 이내 엄청난 에너지를 쏟아부었고, 잠을 편히 못 자는 날들도 많았지만 괜찮았다. 그것은 후원해주신 분들을 위한 도리요, 나 자신이 만들어낼 결과물에 대한 기대감과 자신감도 이유였다. 

 처음 하는 일인데다가 나 혼자 일을 벌린 것은 처음이었기에 몰랐던 것도 있었다. 모두를 위한 넉넉한 시간과 충분한 실력의 사람. 내가 모든 것을 준비해두지는 못했다는 것을 협업을 하게 되면서 더 많이 느끼게 되었다. 그래도 협업을 얼추 잘 해냈다고 생각했고 의사소통도 괜찮았다고 믿었다.


 가제본을 받고 한 장을 넘겼을 때의 기분이란, 세상이 노랗게 변하는 것만 같았다. 왜 세상이 노래진 것 같다는 표현이 생겼는지 너무 잘 알겠는 그런 기분. 오래 전 내 눈앞의 사람이 아파할 때, 나의 의지대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때, 그 때 느꼈던 기분과 함께 잊고 있던 두통이 살며시 다가왔다. 내가 이런 두통이 있었다는 것을 사실은 글로만 적고 있었는데 그것이 현실이 되고 실감이 나니까 너무나 괴로웠다. 화가 많이 났다. 너무나 피곤했음에도 머리가 아파서 잠이 안 올 정도로 화가 난 것은 오랜만이었고, 그만큼 내가 평화롭게 살았다는 반증이기도 한 것 같아서 다행이라는 생각과, 앞으로 돈을 더 쓰게 되면 얼마나 써야 하며 지금 수중의 돈으로 이것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인가라는 복잡하고 어지러운 생각들. 그러면서도 화가 많이 나지 않은 것이 행복의 척도가 될 수 있다면 약 일 년 간 나는 행복했다는 것이기에 얼마나 행복했고 무엇을 했는지 다시 돌아보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당장의 문제를 만든 사람에게 화가 났지만,
이내 그 화는 나에게로 향했다. 

 실은 그런 사람인 것을 미리부터 알고 있었음에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고 돈이 얽혀 있으니 잘할 거라고 생각하고 믿었다. 아닌 건 아닌 것인데 나는 왜 그런 결정을 내렸던 것일까. 그래도 중요한 하나는 마음에 들었으니 돈이 아깝다고 할 것은 아니었으나, 다른 어떤 것보다 그동안의 의사소통에 들였던 노력과 시간이 아까웠다. 연락이 잘 되지 않고 성실하게 일에 임하지 않는 사람은 함께할 수 없다. 그것이 아무리 남의 일이라고 해도 돈을 받았다면 그만큼의 노동력을 써야 하는 것인데,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이제 볼 장은 다 본 것 같은 느낌이다. 그래도 적은 값으로 귀한 경험을 얻었다고 생각해야지. 이 정도는 나쁘지 않다. 긴 시간을 낭비한 것은 아니니까 이제 사람을 쓸 때는 더 신중하게, 일을 맡길 때는 프로페셔널한 사람에게, 돈을 쓸 때는 더 까다롭게 해야겠다. 


 교훈을 얻었다고 해서 일이 마무리되는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 여전히 눈앞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더 큰 문제를 만들었다. 다른 사람으로 인해 문제가 생겼지만 대외적으로는 나의 실수였고 결과적으로 나에 대한 신뢰를 스스로 갉아먹는 짓을 해버렸다. 다수의 사람에게 약속한 기한을 미루게 되었다. 누군가는 뭐 그 정도 가지고 그러냐고 할 수 있겠지만 나에겐 그렇지 못했다. 작은 것에 대한 믿음이 모여서 신뢰가 완성되는 것인데 그 작은 시작을 놓쳐버린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고, 기다려주신 분들에 대한 미안함도 컸다. 또한 내가 이렇게 신경을 잘 쓰는 사람이기에 위대한 자리는 아니지만 지금까지 잘 살아왔던 것 같기도 하고. 그렇기에 지금의 문제는 전혀 사소한 것이 아니다. 


 충격적인 일이었던지라 당장의 적임자를 찾아야했고 여기저기 연락을 돌려두고, 가장 믿을만 했던 언니에게 갑작스럽게 전화를 걸었다. 이렇게 갑자기 전화를 걸었던 적은 없었기에 언니도 당황한 투였으나, 아마 평소 전화를 하지 않던 내가 전화한 것으로 미루어보아 꽤 급한 일일 것이라고 미루어 짐작했으리라고 생각한다. 짧게 안부를 묻고 전화 가능 여부를 묻고 본론으로 들어갔으나 언니에게는 나보다 더 큰 일들이 있었다. 

 내가 여행을 간 사이 언니는 나와 같은 일을 겪었다고 했다. 더 큰돈을 잃었다. 누군가에게는 비좁은 원룸이라도 아늑한 보금자리가 될 집의 보증금으로 쓰일 만한 돈이었다. 언니의 불행으로 나를 위안해야 하는 게 안타까우면서도 그것에 위로가 되지 않는 나의 분노는 왜 가라앉지 않는 것인가 하는 의문도 동시에 가져다 주었다. 결국 적임자는 다른 이를 통해 찾았고 그는 일을 잘 해주었지만, 나는 미뤄진 시간에 대한 아쉬움의 감정에서는 벗어날 수 없었다. 








 언제까지고 화에 파묻혀 있을 수는 없었다. 작업을 해야만 했다. 약속했기 때문에, 신의를 지키기 위해서. 무엇을 위한 신의일까. 어느새 눈까지 침침해지게 만드는 먼지의 소용돌이 속에서 저멀리 보이는 남산의 불빛이 마치 별자리 같다고 생각했다. 내가 먼지만도 못한, 아니 먼지와 같은 사람이라면 신의가 필요한 것이 애초에 맞기나 한가. 가당키나 한 것인가. 먼지의 신의라니. 

 그래, 먼지가 신의있다고 가정해보자. 먼지가 신의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을 향한 것일까 고민해 보면, 아마도 그것은 폐병에 걸리게 하는 먼지와 그렇지 않은 먼지 혹은 자연 발생적 먼지와 인공적 먼지로 나눌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것 또한 인간의 가치에 기대어 표현한 것일뿐 먼지 스스로가 어떤 신의를 가지기에는 존재를 정의할 수조차 없다. 하찮고 조그맣다고 말하는 것도 나라는 인간이 정한 기준이며, 내 앞을 막고 기침이 터져나오게 하는 것을 보면 마냥 하찮다고만 할 수도 없었다. 


 어쨌든 책은 나왔지만 여전히 문제는 많았고, 기분이 좋지 않다. 기분이 좋지 않으면 습관적으로 복잡하고 어두운 생각들만을 하게 되고 표정은 어두워지고 마는데, 평소의 내가 밝고 발랄한 것에 비하면 이것은 굉장한 변화처럼 느껴진다. 이런 기분일 때 누군가와 함께 하기 보다는 혼자 있어야 주위에도 폐 끼치지 않고 나에게도 편해서 좋았다. 예전에 비하면 현실은 많이 나아진 편이지만 나아진 척도는 나 스스로가 정의한 것이라, 나의 예전을 함께 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그저 유추만 가능하고 현재의 내 표정으로 상태를 판단할 것이기에 어떨런지는 알 수 없다.


 그래서 이런 때에는 무얼 해야 하는가. 답이 있다면 참 좋은 세상일텐데. 아쉽게도 답이 없기 때문에 누군가는 슬퍼하고 누군가는 우울해하고 누군가는 죽는 것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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