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감의 무게

- 망고의 맛이 외할미를 살렸네

by 예나네

2018. 9. 29일. 토.

266일 차 재영이,


유행성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 첫날은 새벽에 구토를 했다.


토요일 아침에 일어나 보니, 재영이 엄마와 아빠가 새벽 3시부터 응급실에 가 있다는 메시지가 떠 있었다. 할미는 한 시간 가량 집에서 차분히 기다리다가 마음이 급해져 응급실로 달려갔다. 재영이가 9시쯤 퇴원하는 걸 보고서야, 난 카페로 가서 글을 짓는 내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날 응급실의 전문의 진단으로는, 위 stomach에 가스가 차서 그런 것일 수 있다고 했다.

재영에미와 나는, 재영이가 우유 먹을 때 젖병을 "45도 정도로 세워서 먹여주기로" 했다.( 나의 글 <우주의 무게>에 등장하는 비디오처럼, "혼자 먹도록 하던 연습을 딱 한 번 했는데", 젖병이 눕혀져서 그때, 공기가 들어갔다고 판단해서.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


사흘 후엔 묽은 응가를 30분에 한 번씩 했다.

고 보들보들 투명한 물빛의 재영이 엉덩이가, 점점 이브 사과깔로 빨갛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할미는 온종일 기저귀를 갈고 수크림을 하얗게 바르면서, 재영이 건강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다. 하지만 정작 재영인 무감했다. 사부작사부작 잘 놀았다. 그래 다행이다.
재영에미한테 문자를 보냈다.

"내일 회사 하루 쉴 수 있는가?"
재영에미는 퇴근길에 지 어미 텍스트보고 회사로 되돌아가서, 아슬아슬하게 휴가를 내고 왔다.

이처럼 아기를 키우는 에미들은 자주 아슬아슬하다. 그런 시간의 간극에서 아기가 튼실히 자라나고, 엄마는 어머니스런 여인으로 되어가는 게다. ^^


아기는 불현듯 신발이 벗겨지고, 가끔은 아프기도 하고, 자주 울면서 자란다. 그래 엄마들의 손끝은 분주하고 또 분주하다. 그녀들의 팔다리가 점점 용맹한 독립투사가 된다.



다음 날, 병원에서
"유행성 바이러스"란다.


얼굴이 까만, 예의 바르고 친절하고 똑똑하다는 여의사가 몇 가지 수칙을 말해주었다.


1. 우유를 탈 때 물의 양은 그대로 하고 분유는 절반만 탄다.( 다른 음식은 그대로 먹여도 된다.) 2. 다시 토하거나, 아기가 수분 부족으로 축 처진다 싶으면 바로 병원으로 데리고 간다.
3. 약국에서 수분 보충 워터를 사서 중간중간 보강해 준다.
4. 기저귀를 바로바로 확인해서 갈아준다. (응가뿐 아니라 쉬를 한 번만 해도. 바이러스에 감염될 수 있으니, 양육자는 기저귀 간 손을 깨끗이 씻는다.)

5. 타인에게 전염시킬 염려가 있으니, 될 수 있으면 외출은 삼가고 집안에서 논다.


^ 호주 병원이 대부분 그렇듯이, 약 처방전은 따로 없다.

^ 이 나라 시민권이나 영주권을 가진 이들은 응급실 진료도, 아기 분만도, 일반진료도 다 무료다. 나는 병원문을 나올 때마다 그게 신기? 하다. 물론 비싼 사립병원도 있다.


재영에미와 나는 수칙 사항을 서로 나누며, 칼칼하고 뜨듯한 된장찌개를 시켜놓고 있었다. 두어 시간이 밖에서 그렇게 흘러갔다. 그런데,


아뿔싸!
재영이를 유모차에 너무 오래 앉혀 놓았다.


집에 가서 목욕을 시키려는데, 재영이가 자지러지도록 울었다. 그 두어 시간 사이, 발갛던 엉덩이가 벌겋게 성이 나 있었다. 꽃잎처럼 곱고 연약한 아기 피부라 그토록 아렸을 텐데, 우린 그걸 잠시 잊고 있었다. 이 외할미가 그걸 몰랐다니!

외손주 울음 사이에 낀 외할미 가슴, 뼛속이 쑤시듯 아리다. 우리 착한 재영이, 얼마나 아플까.

거의 찬물에다 속전속결로 씻기고 나서, 수도크림을 고 말갛고 고운 엉덩이에다 이팝꽃이 핀 것처럼 당개당개 두드려서 새하얗게 발라주었다. 재영이 울음이 그치니, 거기서 마치 꽃향기가 나는 것 같았다.




이튿날 재영에미는 다시 출근하고, 할미랑 재영이랑 집안에서 아롱다롱 놀았다. 할미는 자주 재영이의 엉덩이와 동태를 살펴야 했다.
다행히 절반으로 묽게 탄 우유는 이전처럼 잘 먹었다. 그러나 평소에 담뿍담뿍 잘 받아먹던 이유식을 할미가 스푼에다 떠서 내밀면, 재영인 빨간 입술을 자물쇠처럼 꼭 닫고 안 열었다.

할미는 이 궁리 저 궁리 끝에, 말랑말랑 노랗게 잘 익은 망고를 잘게 긁어서 한 수저씩 떠 넣어주었다.


우리 재영이, 열쇠처럼 답싹답싹 입술을 열어 쪽쪽쪽 입을 다셔가며 달게 먹는다. 빨리 안 준다고 꺅꺅 울어 제친다.



어이쿠, 우리 외손주 입맛이 달달하게 되살아났다.



이제 보니 우리 재영이 망고 킬러다.


재영인 그렇게, 망고를 껍질까지 쏙쏙 빨아먹은 후부터 응가가 거짓말처럼 멎었다. 며칠 동안 조마조마하며 달싹 오그라 붙었던 할미 맘이 봄날처럼 사르르 풀렸다.




휴우, 이제 외할미 살 것 같다. 달콤한 망고 맛이 이 할미까지 살렸다.



* 맛감각 ≒ 미감 ≒ 미각 :
맛을 느끼는 감각. 주로 혀에 있는 맛봉오리가 침에 녹은 화학물질에 반응하여 일어난다. 단맛, 짠맛, 신맛, 쓴맛의 네 가지 기본 미각이 있다. (출처 : 표준국어대사전) - 네이버 국어사전에서


-* 2018. 12. 《분당수필》에 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