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리치와 미셸
지난해 겨울,
열두 채의 빌라가 가지런한 곳으로
이사를 왔다.
번다버그 들녘이 한창 사탕수수 수확기이던 그때, 밤새 부나비처럼 마당에 날아든 블랙 스노를 쓸어 담기에 바빴다. 사탕수수의 마른 겉잎을 태우면 불티가 날아드는데 여기 사람들은 그걸 블랙 스노라고 부른다.
쓸어 담으려 하면 나풀나풀 바람에 날아가는 검은 불티는 검불 태우던 내 고향내음을 연상케 하는 반가운 길손이기도 했으나, 흰 눈이 날마다 내리면 치우기 번거롭듯이 조금 귀찮은 존재이기도 했다. 사실 게으른 나는 손바닥만 한 내 집 마당을 치기에도 바빴다.
하지만 열 두채의 마당 끝에 달린 철문의 바깥을 자기 마당이듯 혼자서 부지런히 치우던 할아버지가 계셨는데, 그분이 바로 6호 집주인이었다.
그뿐 아니다. 매주 화요일마다 쓰레기통을 바깥 길가에 내다 놓고 쓰레기 차가 수거해가면, 12개의 통을, 아니 한 달에 두 번은 24개다. 그걸 혼자서 다시 게이트 안으로 들여놓던 일은, 6호 집 리치 할아버지의 몫이었다. (칠순이라시니 요즘 같은 장수시대에 그리 할아버지도 아니다.)
이사하고 보름이 좀 지났을까.
어딘가에서 크르릉거리는 기계음이 났지만 나는 귓전으로 흘려들었다. 그러다 미심쩍어 현관문을 살짝 열어보았다.
리치가 우리 집 창문 앞의 나무를
동그랗게 다듬고 있었다.
점점 지붕으로 닿는 건 고사하고 출입로까지 막으려는 저 나무를 어떻게 해야 할 텐데, 하며 나 혼자 고심하던 차였다. 그때 리치가 우렁각시처럼 나섰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감사하다고, 이 낯선 동양인 여자가 말을 더듬으며 속 마음을 전했다.
리치는 그저 씨익 웃으면서 땅에 흩어진 나뭇가지를 손수 끌고 온 손수레에다 쓸어 담아가기까지 마무리를 깔끔히 해 주었다. 이발을 한 듯 가지런해진 나무는 잎사귀마다 이웃 사랑, 그 하트를 뿅뿅뿅 달고 있었다.
또, 자기네 집 차고의 도어를 열어두고 팔걸이의자에 앉아 이를 지켜보고 있던 리치의 아내 미셸 할머니에게 가서 너무 감사하다고 내 마음을 전했다. 그러자 몸집이 좋은 미셸은 걱정하지 말라며, 워낙 남편은 그런 일을 재미있어한다고 했다.
그리고 자기 남편이 폐암에 걸려서 걱정이라고.
그랬는데, 며칠 후 미셸이 입원을 하였다. 리치가 아니고 미셸이.
당뇨가 그리 무서운 병인지 난 몰랐다.
쇼크가 와서 입원한 지 보름도 안돼서 미셸은 하늘나라로 훨훨 날아가고 말았다. 믿기지 않았다.
미셸이 떠나고 한 달이 지난 어느 날 리치를 집 앞에서 잠깐 마주쳤다. 방사선 치료를 받았는데 온몸이 피곤하고 아프다고 했다. 아내가 떠난 후 이야기할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너무나 외롭다고, 마치 누나에게 응석 부리는 손 아래 브라더 같았다고나 할까.
얼마나 아프셨으면 나한테까지 고통과 고독을 표출하셨을까. 아무것도 해 드릴 수 없는 나는 아픈 마음의 선율만 자꾸 짠하게 울렸다.
며칠 후 브리즈번에 사는 고명딸 리나가 다시, 이번엔 친정아버지를 보살펴 드리러 돌아왔다.
그러다, 그러다가, 두 달도 채 안 돼서 리치마저 우리 곁을 떠나고 말았다. 리치의 외손녀이자 리나의 딸이 닥터가 되는 학위 수여식 날, 축하하기 위하여 브리즈번에 가셨다가 그날 아침에 그만 영면에 드셨다.
하늘에서 내려온 흰 눈이 속절없이 녹는 일처럼, 미셸도, 리치도, 한순간에 눈을 감은 채 하늘로 펄펄펄 날아가고 말았다.
어쩜 생은,
깃털보다 가벼운 흰 눈을 닮았다
딸 리나는 남편 로드와 함께 부모님 유품을 정리하고 세간을 치우는데 두어 달이 걸렸다. 그리고 집을 부동산에 내어 놓았는데, 리나는 성격이 부모님을 닮은 듯 이타적이고 활발하였다. 로드는 정이 많고 친절하였는데 어느 날 우리 집 앞 나무를 자기 장인이 하듯 똑같은 방법으로 한번 다듬어 주었다. 내가 부담을 가질까 봐 그랬는지 정원수 다듬는 일이 자기의 취미라고 했다.
우리가 한국에 가 있는 동안 리나와 로드는 집을 팔았다. 그리고 브리즈번에 내려가서 엽서를 보내왔다.
사랑하는 이바와 홍에게
우리는 이제 아쉽지만 헤어져야 하는구나.
우리 아버지가 편찮으실 때와, 우리가 집을 팔려고 그곳에 머물던 동안 위로해주고 격려해줘서 고마웠어.
너희 둘은 정말 좋은 사람들이야. 안녕!
리나와 로드가
100일 안에 부모님을 연이어 여의고 슬픔 속에서 경황이 없을 시기였을 텐데.
우체국까지 가서 엽서를 사서 잠시 만났던 이 동양인 여인에게 땡큐 카드까지 썼다니.
빨간 우체통에다 그 정성을 넣었을 리나를 생각하니, 눈물이 핑 돌았다.
리치, 미쉘, 리나, 로드. 그들이 이 엽서 안에 살아 있기라도 한 듯,
내 손은 자꾸만 엽서를 쓰다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