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영아, 뽀로로 보러 집에 갈까

by 예나네

2019. 8. 29. 목.

오늘도 파크에 가려고
재영이 손 꼭 잡고 47계단을 내려왔다.




계단을 내려올 때마다 외할미와 외손주 발자국 박자를 서로 기막히게 잘 맞춰서 계단 하나하나를 톡탁톡탁 악기 두드리듯 디딘다. 우린 화음 공부를 따로 연습하지도 않았는데, 이건 운명적으로 만난 원더풀 듀엣 탭 댄스 같다. ㅎ

근데 오늘은 평소와 달리 하나, 둘, 셋 대신 원, 투, 쓰리... 포티 세븐의 구령을 붙이면서 내려왔다. 내년에 여기 시드니에서 어린이 집을 보낸다는데, 지금 20개월 반차인 재영이, 아직 A, B, C, D... 알파벳만 어설프게 가르쳐 놓았다.


나는 슬그머니 염려가 된다. 재영이가 집에서 한국말만 배우다가 현지의 어린이 집 가서 화장실 가고 싶으면 어떻게 하느냐고, 토일릿 Toilet이라도 가르쳐 주라고 재영에미한테 일렀다. "재영인 한 번 가르쳐주면 금방 배워서 문제없으니 걱정 마세요." 한다. 그래도 급하면 어버버 꼬부랑 말이 안 나와서 그만 싸버리면 어쩌려고. 하긴 재영에미 어련히 알아서 잘한다. 모성애가 둘째가라면 서운한 굳 마더니까.



주변을 돌아보아도, 재영이 또래가 지금은 집에서 한국말만 하고 있는데, 두 살부터 어린이 집을 가도 영어 배우는 데는 늦지 않단다. 오히려 자라면서 모국어를 잊지 않도록 자주 챙겨줘야 한단다.




여하튼, 오늘은 오전부터 재영이가 마다 시마다 그리도 가고 싶어 하는 '파크' - 재영이에게 콧바람 쐬는 외출은 무조건 파크다. - 에 가려고 할미랑 같이 47계단을 내려왔는데 글쎄, 조락조락 이슬비가 내린다. 실내에 플레이 그라운드가 여럿 있는 인근의 쇼핑센터를 가더라도, 유모차에 태워서 8분을 걸어가기엔 빗줄기가 세다.




파크 간다고 좋아라 하며 꼭대기 층서부터 신나게 자박자박 걸어 내려와 주차장에서 이리저리 뒤뚱뒤뚱 춤추듯 뛰어다니는 우리 재영이를, 이 할미가 어떻게 다시 집으로 데리고 올라갈까? 똥고집 심줄이 장난 아닌 요 꼬맹이 외손주 달랠 일이 난감하다.

이 궁리 저 궁리 끝에,


재영아, 우리 뽀로로 보러 집에 다시 가까.



아고, 우리 외손주 소리에 귀가 번쩍 뜨였다. 저~쪽 문 앞에서부터 좋~다고 고 쪼그만 발이 안 보이도록 오라 라라라 옹 ~ 달려오더니, 고 따끈한 떡국 손으로 외할미 손을 꼬옥 잡고서 다시 계단을 올라온다.

원, 투, 쓰리, 포.... 포티 세븐!

아기 프로그램 뽀로로를 틀어준다니까 힘이 더 붙는지 엇, 엇, 엇! 하고 구령을 앙증맞게 붙여가며 한 계단 한 계단을 이쁘고 힘차게 딛고 올라온다. 정녕, 남아답다.


우아, 다 올라왔다. 짝짝짝! 재영이 최고!


평소 같으면 집안으로 바로 안 들어오던 재영이. 오늘은 집안에 달달한 꿀떡이라도 남겨놓은 듯 급하다. 매번 집 앞 복도에서 볼일이 하 많아서 할미랑 실랑이를 하곤 하던 나의 외손주. 문 앞에서 매번 서성거리다 난간을 붙잡고 손가락 방향을 밑으로 숙여서, 가물가물하게 내려다 보이는 저 밑 계단 숫자를 세는 흉내를 내거나, 복도를 왔다 갔다 하면서 오물쪼물한 손바닥으로 이웃집 문까지 툭툭 치거나 어루만져보며 동네 반장 역할까지 하더니, 오늘은 자기 집 출입문을 연 할미 손을 꼭 붙잡고 냉큼, 고 쪼그만 발을 재빨리 들여놓는다. 재영이 발은 지금 로로 만나는 게 급하다.


할미는 할미 방 노트북을 얼른 켜서 뽀로로를 틀었다. 재영인 금세 할미 무릎에 앉더니 로로에 온 정신을 포옹 쏟는다. 자기가 좋아하는 장면이 나오면 두 손을 치켜들고 꺄우웃 하고 소리까지 지르면서, 참 실감 나게도 시청한다. 이 프로그램 만든 피디가 보면 우수 시청자감으로 뽑히고도 남을 듯. 외할미가 포로로가 그키 재밌냐며, 외손주 엉덩이를 투덕투덕 두드려도 지금 재영이한테는 접수 불가다. 온 정신이 화면에만 포옹 빠져있다.


20190901_073330.jpg 재영이가 좋아하는 뽀롤뽀롱 뽀로로. 출처 : 유튜브
요즘 아가들에겐 '뽀로로'가
예전 아가들의 '곶감'만큼 달다는 걸, 할미는 오늘 확실히 확인했다.

그러다 재영인 베란다에 나가 한참을 놀다가 할미 방에서 포롱 잠이 들었다. 귀여운 재영이, 새근새근 낮잠 중에도 뽀롱뽀롱 뽀로로 꿈 꾸려나.


아가의 잠자는 모습, 언제 봐도 세상 편하고 이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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