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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나네 Oct 10. 2022

집 • 4

- 31번지 브리즈번 첫 집에서 좌충우돌한 만큼 더 뭉쳤던 우리 가족


우리 네 식구, 아니 내 마음 깊은 속에서 언제나 함께하던 남편까지, 다섯 식구를 실은 인생의 열차는 우리를 브리즈번의 큰 하우스에다 내려놓았다. 우리 가족은 그 집에서 짧게 두 번을 렌트해서 살았다. 31번지는 브리즈번에서 우리의 첫 집이자 마지막 집이었다.




리라는 도 건축가가 직접 설계하다는 그 엄청 큰 집은 내 마음에 들었다. 그 당시 60대 후반이던 주인 해리 아저씨도 친절했다. 2마스터룸과 1층의 비지터 룸과 라운지크기란, 운동장만큼이나 컸다.

앞으로 내 평생 만큼 방에 대를 둘 기회더 이상 없을 다. 그런데, 나중에  집으로 두 번째 이사하고, 집들이 때 지인 한 사람은,  사람이 집에 압도될 것 같다는 말을, 지나가는 말로 했었다. 집이 야말로 허벌스럽게 컸다. 정말로 두 번째 살던 그 집에서, 난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물단지를 하늘나라로 보냈으니. 그 지인이 흘린 말이 헛말이 아니었음이 증명되었으니.



사람의 인연은 묘해서 인도인 해리 아저씨네 가족과는 8년 후 우리가 시드니로 이사할 때까지 서로 만나면 반가운 사이로 지냈으나, 첫날부터 공항에서 만나 할 달간 정착 일을 봐준 그녀, 한국인과는 그 이후로는 얼굴 한 번 마주친 일도 없었다. 정착기간 한 달 동안 서로 얼굴 붉힌 은 없었으나, 에이전트 일이 끝난 후, 내가 열댓 번을 문자와 통화를 시도했는데 그녀는 묵부답이었다. 가구배달이 두 달 늦어도 달리 연락할 데가 없어 난감하고 불편했었다.

해외 생활하는 국사람들 사이에서 흔히 들려오는 말들, 즉 해외에서  공항 픽업 온 사람과웬수지간이 되는 게 통례라는, 웃지 못할 우스갯소리가 거저 하는 말은 아다. 만큼 첫 해외정착은 어렵다. 일을 봐주는 사람도, 첫 정착하는 사람도.



첫 집에서 한국과 호주 사이의 충격적인 문화적 충돌, 그 두 가지는 이거였다.



새로 산 가구를 우리가 직접 조립하는 일이 기다릴 줄은 몰랐다. 아시다시피 국에서는 가구를 주문하면 배달 오시는 분들이 우리가 배치하고 싶은 자리에 놓아주셨다. 비자 입장에서 마나 편리한가.



그러나, 침대 3, 책상 4, 컴퓨터 책상 1, 식탁 1, 식탁의자 6, 소파 1, 책꽂이까지! 딜리버리 맨은 우리의 태산같이 많은 가구를 꽉 묶인 포장박스에다 담아와서 그냥 거실에다 버리듯 부려놓고 트럭을 몰고 붕, 떠나버릴 줄은 몰랐다. 두꺼운  상자를 버리는 일도 큰 난제였었다.  정말, 과수원에서 살다가 도회지로 이사하고 난감했던, 쓰레기 분리수거, 그것은 힘든  축에못 들었다. 내 머리로는 도저히 시작하지 못할, 우발적으로 감하고 지독하게 난해한 일이 기다리고 있으니. 한 번도 조립해 본 적 없던 가구 조립 공장 앞에서, 난 어찌할 줄 모르고 넋이 나간 사람처럼 한동안 멍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에겐 명석하고 창의적이고 협동심 강한 중, 고, 대학생 세 아이들이 있었다. 방과 후 아이들이 모여서 틈 나는 대로 가구 하나하나를 조립하여 완성해내었다. 아이들에 의해 식탁이, 의자가, 책꽂이가, 소파가... 집 집답게 꾸며지는 걸 지켜보는 사십 대 중반 둔했던 엄마 그저 뿌듯했다. 다행히 아이들은 그 일을 즐겨했다.



 번째는 렌트 재계약을 한 사건이었다. 착하고 4개월쯤 지났을까, 어느 날 종이 몇 장 우편으로 받았다.  해석할 수 없는, 영어로 쓰인 렌트 관련 서식에 대해 난 한 번의 사인을 해서 우편으로 쿨하게 휙 보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건 렌트 재계약에 대한 사인이었다. 렌트 재계약을 하려면 한국에서처럼, 부동산에 가서 서로 마주 보고 앉아 차근차근 설명을 듣고 사인하는 줄 알았다. 우린 51번지에 집을 사서 이사를 가기로 계획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6개월 연장에 사인을 하는 게 아니었다. 그러나 그때 우편으로 날아온 계약서에다 사인 한 번 쿨하게 해버린 바람에 그때 우리 돈으로 600만 원이 휙 사라져버렸. 

집이 워낙 크다 보니 렌트가 바로 안 나간 이유도 만, 따져보지도 않고 인을 한 나의 실수 때문이었다. 누군가는 해외에 처음 오면 그런 일이 종종 생긴다며 적응하는 데 교육비 지불한 거로 생각하라고 일러주었다. 



오기 전 한국에서 계간지의 편집위원을 하며 써오던 글을 계속 썼다. 독서 지런히 했다.  인터넷으로 철학 강의 꾸준히 들었다. 해, 2007년 12월에 론가라는 명함을 하나 더 달았다.


근 호주교회 두 곳에 가서영어 나름 열심히 배우고 익혔다. 나의 둘째 딸은 냉장고에다 어려운 단어를 붙여놓고 지엄마를 가르쳤었는데, 그때 외웠던 "분위기 atmosphere"라는 단어의 발음이 가장 어려웠었다. 그리고 둘이 소리 내어 외웠던 기억이 지금 생각해도 따스하다.  공부도 어려웠을 텐데 그때부터 둘째 딸은 엄마에게 영어를 가르치려고 온갖 노력을 다 했다.

외국에서 나의 40대 중반은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이곳에서 세 아이들은 각자에게 부여된 공부를 하는 동안에, 나는 아이들 곁에서 글을 읽고 쓰고 배우고, 익히리라, 다짐했다. 호주에 가디언 비자로 일을 하여 돈을 번다는 건 불법이 이곳에서 난 밥벌이는 하지 않았다. 그저 통장 잔고를 최대한 절약했다.




아침 8시에 막내와 둘째를 하이스쿨 앞에 내려주고, 오후 3시가 되길 기다렸다가 픽업을 해오는 차 안에서도 우린 많이 웃었다. 대학생이던 큰딸은 버스를 타고 브리즈번 시티로 학교를 다니면서 언제부터인가는 도미노피자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큰딸이 한국생활을 너무 못 잊어해서 엄마와 딸이 서로 병이 날 것만 같았다. 자꾸만 돌아가고 싶다며 5개월 동안을 울고 또 울었다. 그것만 빼면 처음 해보는 해외생활의 수레바퀴도 수월하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나는 하는 수없이 한국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그러고 나서 3일 후부터 큰딸의 향수병이 거짓말같이 사라졌다.

감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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