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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나네 Oct 07. 2022

집 • 3

- 1기 신도시 우성 아파트에 살던 때, 나의  아이들이 초록 초록했다



막내가 초등학교 2학년이 되던 그해, 2000년도에 난 세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그리고 과수원 일이 혼자 힘으로는 벅차기도 해서 도시로 나왔다. 그간 준비해둔 몇몇 자격증을 들고 나왔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면 엄마를 볼 수 있는 집에서 하는 일을 택하였다.



신도시 아파트에 처음 이사한 날, 내배나무 이천 오백 그루를 키우던 일보다  더 난해했던 일, 그건 쓰레기 분리수거를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30평대 창문이 꽉 닫힌 도시의 아파트 안에서 점점 늘어가는 쓰레기 더미 앞에서 난 가장 난감했다. 금 생각해도 그깟 일은 너무 쉬웠을 것만 같은, 말이 안 되는 제였으나, 그때  정말 그랬다.



과수원에 살면서 일을 도와주시던 할아버지네가 살던, 우리 옆집이 한 집 있었다. 그때 할머니가 자하셨던 말씀, 도시 사람들은 살기가 편한데 ㅇㅇ엄마는 배울 만큼 배워놓고 촌으로 집을 와서 이 고생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네. 밭일이 많을 때마다 하시던 할머니의 그 말씀이 새삼 떠올랐다. 그러나  난 시골 태생이어서 그랬는지 과수원이 내 생리에 맞았다. 내게는 도시생활이 거주춤했다.



우선, 나의 도회 삶은 일을 안 했는데도 피곤한 나날이 지속됐으니까, 괜히 짜증 나고, 힘들었.

과수원에 일하러 오시며 털털하게 인사를 나누던 모습과는 달리 좁은 엘리베이터에서 나누는 인사도 뭔가 틀에 박혀 경직된 거 같았다. 갑갑하고 답답했다. 운이 좋게도 우리 집은 3층이어서 난 계단을 많이 이용했다.



그 와중에도 난 이사 간 그 아파트에서 바로 논술 선생이 되었다. 우리 네 가족의 밥벌이를 시작했다. 다행히 우리 집 거실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때는 머리가 안 아팠다. 정신이 바짝 들었다. 밥벌이였으니 그랬을까.



그럼에도 난 도회지의 그 아파트에서 2007년 1월, 외국으로 태평양을 날아올 때까지, 7년을 큰 탈없이  살았다. 집과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쳤고, 글을 썼고, 시 작가가 되었고, 계간지 편집위원을 했고, 책을 많이 읽었고, 철학, 문학을  고, 국문과대학원을 졸업하였고, 큰아이가 대학에 들어갔다.



그러고 보니 독서실에 두 달간 새벽 두 시까지 틀어박혀서 석사논문을 썼다. 틈틈이 써둔 글로 책을 두권 출간했다.


아래 아이들은 중, 고생이 되었다. 물론 사람 사는 세상 우여곡절이 많았다. 그래도 우리 가족을 실은 열차는 시간에 맞게 우리를 인생 열차에  싣고, 내려 주었다. 그 아파트에서 나의 세 아이들이 자라나는 모습은 늘 초록 초록했다.

감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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