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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나네 Oct 06. 2022

집 •2

- 시간의 바깥에 도움의 손길이 있는 것 같았다


고향 총각이 배 과수원을 하던  평택으로 시집을 왔는데, 그 집은 만 육천 평의 과수원 안에 든 큰 섬처럼, 마을의 맞은편 언덕으로 둥그스름하게 버티고 있었다. 거기도 눈 뜨면 바로 초록초록이었는데, 다행히 난 그때의 초록은 참 좋았었다.




을 사람들은 우리 집을 '큰과수원집'이라 불렀다. 천장이 높고 집의 규모 컸고 주위에 딸린 집과 창고, 그리고 연못  있었다. 그 집은 겨울에 외풍이 엄청 심했다. 결혼한 첫해에 대대적인 집수리를 했는데도 외풍은 수리되지 못했는지, 그겨울에 첫딸 보드라운 볼살이 거친 외풍에 발갛게 변했다. 그러다 끝내는 아가의 살이 따갑게 텄다. 젊은 엄마가 아가의 볼에 콜드크림이나 호랑이 연고 같은, 별 걸 다 발라주었으나 과수원 언덕에서 안방까지 불어온 칼바람의 앙칼짐을 못 이기고 말았으니. 지금 생각해도 그때 겨울바람은, 몇 년 후, 남편 없이 아이들과 살던 그 집에서 현금 50만 원 훔쳐 간 좀도둑보다 더 밉다. 



 집에 산 지 7년 반 만에 이천 오백여 그루 중 한 그루, 즉 크고 오래된 나무 사이의  젊고 어린 배나무 한 그루 인해 남편은 생명을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집에서 세 아이들의 가장으로, 오래되거나 젊은 나무의 주인장으로 기로 작정했다. 남편이 그토록 젊음을, 아니 목숨까지 바쳐가며 일구어놓은 그 밭을, 내 양심은, 그곳을 빠져나올 수 없도록 저지했기 때문이다.



나는 남편이 떠난 다음날부터 밤에 무섬증부터 없어졌다. 집안에 있는 화장실도 혼자 못 가고 잠든 그를 깨우곤 했는데 나 혼자 화장실을 거뜬히 다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거실에서 혼자 tv를 볼 때마다 창문에 시커먼 그림자가 나를 쳐다보는 것 같던 그 무섬증도 같이 사라졌다.
불행 중 참으로 다행이었다.




편이 떠나고 나서  7년을 더 살았으니 총 15년을 과수원이라 불리는 과수원 안에서, 세 아이들과 함께 생을 버티듯 살았다. 래도 한창 쑥쑥 커가는 세 아이들이 있어 내게도 자라는 꿈이 있었. 그래서 행복한 날이 슬픈 날보다 더 많았다.



그곳에서 '귀신'이라 불리던  남편이 하던 일을 고스란히 물려받았으니 일만 해도 벅차게 많았다. 살아생전 남편이 했던 말이 자주 떠올랐다.

자네는 여기서 무조건 사람들한테 많이 나눠주고 살면 돼. 무엇보다 배도 많이 나눠주고, 사람들 만나면 밥도 사주고, 마을 아들 불러서 과자 파티도 하고 그래, 그게 잘 사는 길이야. 난 네가 여기서도 공무원같이 일일이 따지고 사는 건 싫다 싫어.



공직에 계시 형들이 따지고 사는 거 볼 만큼 봐와서라 했다. 들을 좋아하면서도 남편은 일일이 따지고 살아야 하는 생활은 싫어했었다. 자주 들어서인지 남편이 있을 때나 떠난 후에도 나도 남편의 바람 살아가고 있었다. 나도 편했고 남편도 편했고 마을 사람들도 좋아했다. 그러니 우리 과수원항상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친절은 진실이 통하는 것이지 많은 것을 거저 주길 바라는 건 아니다.



90년대 그 당시에 농촌 일손부족을 우리 과수원에서는 딴 집만큼  심각하게 겪지 않았다. 오히려 인정 많은 아주머니들께서는 우리 집부터 먼저 일거리 걱정을 해주셨다. 든든하고 고맙기가 우리 과수원에서 수확한 배의 단물처럼 가슴 가득 찼었다. 그러니 우리 부부가 1999년까지, 15년 동안 애지중지 가꾸던 가곡농원 배는 대한민국에서 최고의 상품 중 하나 되 있었다. 서로 도움과 사랑의 힘이 그만큼 지대한 공을 했다.



남편이 가고 난, 남편이 써 둔 영농일지를 눈과 종이가 닳도록 읽고 또 읽고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모르게 밤낮으로 머리를 익혔고, 앞장서 일을 했고, 일이 되도록 일을 시켰다. 농번기가 되면 1년에 대여섯 차례씩 인천에 살던 여동생이 자기 아이들 둘을 데리고 와서 열흘씩 집안 살림을 맡아주곤 했었다. 그 덕에 난 바깥, 과수원 일을 마음 놓고 할 수 있었다. 물론 가족들의 보살핌도 있었지만,  당시 김헌웅 회장님을 비롯한 29명의 이화회 회원분들의 도움었다면 난 과수원 경영에 성공하지 못했다. 남편이 떠난 후에도 그분들은 변함없이 내게 친절했다. 그 신의가 없었으면, 텔레비전과 잡지에 나오는 건 고사하고 남은 우리 네 가족은, 불현듯 가장이 된 나의 과수원 경영 실패로 가난에 들었을지도 모른다.



와중에   유아교육 대학공부를 했고, 작가가 되었고,  개의 글짓기, 독서 지도자 자격증을 땄고, 아가와 어린이던 세 아이들이 과수원 마당에서  무럭무럭 잘 자라났다. 지금 기억을 되돌려보면 남편 없이 과수원에서 살 7년 동안은, 사람의 힘이나 능력으로서는 도저히 해낼 수 없는 일이 현실로 일어나고 있었다.  육천 평의 과수원 일과  학업과 세 자녀양육 아무리 생각해도 내 능력 밖의 일이었나, 그 무게를 싣고도 생의 바퀴는 연한 듯 굴러갔으니,  감사하기 그지없는 시간이었다. 


시간의 바깥에 도움의 손길이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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