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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나네 Oct 05. 2022

집 •1

 - 국민학교부터 결혼 전 공무원 퇴직할 때까지, 난 참 많이 걸었다



한 사람의 일생은 한 사람이 쭉 살아오던 집들에 의해 복원된다. 한 사람의 생의 가을에, 한 사람의 집을 한 번 추수해보는 일도 나쁘진 않을 것 같다.




한 사람이 있었다.

이때껏 생을 통틀어 국에서 산 46년 중 아파트 생활 2000년도부터 7년 정도 했다. 그리고 작은 집 큰집 서 39년을 더 살았다. 16년 전 호주에 온 후는 브리즈번의  하우스 두 개를 거쳐, 시드니의 한 아파트에 살았고, 금은 호주 시골 단층 타운하우스에 산다.





어린 시절, 초가지붕에서 기와지붕으로 변한 언덕 위 작은 시골집에서 살았고, 중고교 시절에는 자취집, 이모 할머님이랑 안동 어느 골짜기의 양계장 안에서, 그리고 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공무원 시험 합격하면서 귀향하여  파란 페인트가 칠해진 지붕 밑에서 아버지와 둘이 꽤 오래 살았다.  무실에 비상이 걸린 날은 자전거를 타고 새벽 출근을 했지만, 보통은 30여분을 그때도 흙길을 걸어 버스를 탔다. 



내가 걷던 주변은 온통 밭과 논과 산과 하늘뿐이었다.  학생 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난 파마를 했고 화장을 했으며 분홍색 양산을 쓰고 다녔다. 공무원 신분이어서 화려한 옷은 못 입었다.



그 시기에는 참 많이도 걸었다. 국민학교 때부터 책보나 가방을 들고 타박타박 하염없이 걸어서 꼬맹이 걸음으로 원웨이 한 시간 거리 학교를 다녀야 했다. 다른 수단은 없었다.



이모할머니와 안동 안기동의 언덕바지  양계장 안에 살 때도 난 걸었다. 묵직한 책가방 외에 신발주머니, 체육복, 그리고 그땐 교련복까지 있었다. 원웨이 한 시간이 넘는 길을 어김없이 걸어서 안막동 골짜기까지, 등교와 하교를 꼬박꼬박 했다. 그러다 고3 때는 학교 안의 기숙사에 들어갔다. 



그때 국민학교와 다른 점이 있었다면, 국학교 때는 이상의 "권태"에 나오는 산등성이와 들판의 초록뿐이었고, 여고 때는 교 앞 언덕을 내려오면 강기슭같이 둥글게  번 구부러진 도로를 따라 시장과 상점과 학교가 보이는 도회지를 거쳐야 비로소 양계장으로 이어지는 개울과 소로가 나온다. 난 밤중에도  이곳을 반드시 야 했다. 다른 방도는 없었다. 



이렇게 결혼 전까지 대부분의 시간은 걸어야 다.  빛 아래서 는 건  지겨운 노동이었다. 걸음을 떼 놓을 때마다 보였던 건 오로지 초록뿐이던 시절이었다. 길 위에서 서로 꿀 먹은 벙어리처럼 나와 마주쳤던  초록 빛깔, 그것지루하 답답하짝이 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나이 들어 그때를 회상해보면, 어머니처럼 내 곁에서 늘 동일한 장소에서 늘 초록의 표정으로 하염없이  지켜보던 말로, 내 삶의 자양분이 되고 , 이제야 알겠다.



금까지 살아오면서 크고 작은 삶의 실패를 절망으로 버리지 않았던 저변에는 징글맞게도 지루하  록이 내 안에 존재해서다. 가까이, 혹은 먼 데서 지겹도록 나를 지켜봐 주던, 녹의 입은 푸른 생명체들이 나의 삶을 푸르게 켜주었고, 지금도, 그리고 나의 미래에서도 나를 보위한다.  



분명 그렇게 걷던 나의 시절에 나의 신발과 윗도리와 장갑과 목도리의 표면적은 점점 넓어져갔고, 나의 생각도 조금, 아주 조금씩 깊어져 갔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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