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요한 산사에 함박눈이 온다. 앙상하던 산속의 나뭇가지가 양팔을 올려 눈을 반긴다. 눈은 나뭇가지에 새하얀 옷을 입혀준다. 산사의 마당에도 지붕에도 눈이 내린다. 동자승이 첫새벽에 물을 뜨러 가다 눈송이를 받는다. 펴진 손바닥에 사르르 눈이 녹다가 쌓인다. 시린 줄도 모르고 눈을 한 옴큼 쥔 손이 꼭꼭 눌러, 둥근 눈을 만든다. 반질반질한 구球가 된 - 눈 덩이 하나가 동자승 손바닥이 움직이는 방향대로 구른다. 앞면과 뒷면이 따로 없는 동그란 덩이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자꾸만 굴려본다.
잠시 후, 굴리던 손을 멈추고 덩이를 가만히 바라본다. 손톱으로 눈 덩이에다 눈을 그리고 입을 그려 넣어 그리움을 만든다. 눈 덩이를 자신의 얼굴에 대니 따스함이 느껴진다.
‘엄마, 누이, 벗….’
아침 햇살을 받은 눈 덩이가 빛나듯 동자승의 눈동자가 빛난다.
동자승은 눈 덩이를 마당에 내려놓고 이리저리 팔을 내저으며 굴리기 시작한다. 그러자 눈 덩이도 동자승의 마음도 부풀기 시작한다. 벌떡 일어나 달리면서 눈 덩이를 따라다니자 눈덩이는 뽀드득뽀드득 장단을 맞춰 구른다. 구球의 모양을 한, 눈 덩이는 넘어질 일도 거꾸로 돌아갈 일도 없다. 굴리는 대로 하얗고 둥글게 몸피를 더하며 돌아간다. 떠오르는 그리움이 많을수록 동자승의 걸음걸이에 속도가 붙고 돌아가는 눈 덩이에 힘이 실린다.
‘구슬, 자전거, 운동장….’
눈 덩이 하나를 완성하였다. 동자승의 팔로 한아름쯤 되는 덩이를 따로 둔다. 멋모르고 내린 눈송이는 어엿한 눈사람이 될 것이다. 윤회일까. 하늘에서 온 눈송이가 동자승의 마음속으로 스며들어 눈사람이라는 새 생명으로 탄생된다.
눈으로 덮인 하얀 겨울 산사는 동자승 자신만을 위해 존재하는 눈 나라다. 지금 동자승에겐 눈사람을 만들기 위해 굴리고 있는 눈 덩이가 전 지구다.
동자승은 다시 눈 내리는 화폭 속에다 양손바닥을 집어넣고 눈을 받는다. 손바닥에 눈이 쌓이자 또 뭉치기 시작하더니 땅바닥에 내려놓고 눈 덩이를 굴린다. 뿌드득 뿌드득. 아까보다 좀 더 큰 눈 덩이가 만들어지자 따로 두었던 덩이를 가져와 그 위에 포개 놓는다. 솔방울로 만든 눈동자, 배시시 웃는 붉은 열매로 장식한 입술. 눈사람은 한 소녀의 모습이다. 추울까 봐 빨간 플라스틱 바케스 모자와 머플러를 가져와 눈사람 위에 씌워준다.
다시 그리운 사람들을 순서대로 떠올린다. 공양시간이 되어도 배고픈 줄 모른다. 종일 눈을 굴리고 마음을 굴리고 팔을 굴린다. 하늘도 동자승의 마음을 아는지 함박눈을 끝없이 내려준다. 물아일체다. 아무리 뭉치고 굴려도 눈은 쌓인다. 산사가 눈으로 포근하다. 하얀 나라다. 영원히 전 지구가 눈으로만 덮일 것 같고, 동자승은 눈 덩이를 굴려 평생을 눈사람만 만들 것 같다.
해가 이울고 밤이 오지만 아직 세상은 하얗다. 방으로 들어온 동자승이 이부자리를 편다. 이불을 덮고 눈을 감은 동자승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하루가 모자라 꿈속에서도 허공에 손을 넣어 눈을 받아서, 눈사람을 만드나 보다. 눈 덩이를 꿈속에서도 하얗게 굴리나 보다. 굴리고 굴려서 벗에게 닿아 구슬치기를 하다가, 또 굴려서 누이 옆에 다가가 재미난 얘기를 듣고 또, 또 굴려서 엄마에게 달려가 따스한 품에 안겨 소록소록 잠이 들었다.
- 어느 눈 오는 날, 고색 찬연한 산사에 들어서니 불상보다 눈사람이 먼저 반긴다. 키 낮은 장독대처럼 서 있는 3인의 눈사람은 산사의 동자승이 눈 덩이가 지구인 양, 종일토록 굴려서 세워 놓은 거라 한다.
나도 눈을 뭉쳐본다. 하얗고 동그랗다. 꼭꼭 눌러 동글동글하게 다듬으니 반질반질한 구球가 된다. 손바닥에 올려놓고 굴려본다. 동자승이 좋아하는 구슬이다. 몇 개를 더 만들어 키가 작은 눈사람 앞에 놓아둔다. 빛을 받은 눈사람이 반짝, 하고 빛난다. 내 가슴도 반짝, 인다.
다시 눈을 뭉친다. 둥글게 앞서 구르는 눈 덩이를 내가 쫓아다닌다. 눈사람 키만 한 하나의 눈덩이가 되었다. 지구이다. 동자승의 고향집, 학교 운동장…, 동자승의 그리움이 다 있는 곳이다.
* 본문사진 - 화가 신경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