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시

by 예나네



바람 하나 : 風

뒤뜰 플라타너스 네 그루의 징후가 예사롭지 않다.

평소 30척 장신의 플라타너스는 바람과 어우러져 여린 음과 센 음, 빠르거나 느린 선율로 나뭇가지의 현을 번갈아 탄주 하였다. 절대 자연의 소리가 내 귀를 유인했고, 잎사귀들은 서로 살랑이며 하모니를 업 up 시켜왔다. 그러나 오늘 뒤뜰에서는 괴이한 소리가 난다. 나무의 가는 허리가 부러질 듯 휘어지는 바람을 타고 휘이잉휘이잉, 말울음 소리를 낸다. 우박까지 동반한 바람이 플라타너스의 넓은 잎에 드럼을 때리듯 내리친다.

옷을 여미며 뒤뜰로 나가본다. 비가悲歌인가. 푸른 기운이 채 가시지도 않은 잎들이 단조의 음표처럼 공중에 나부낀다. 우박은 떨어지는 잎사귀를 찾아 툭탁툭탁 신나게 두들기며 잎새에 멍울 같은 구멍을 내고 있다.

떨어진 나뭇가지는 초록 잎을 단 채 땅에 뒹군다. 스무 살 청년의 나이라 애통하기만 하다. 그래서인가. 못다 키운 분신을 바람에 앗긴 나무의 울음이 꺼이꺼이 하는 상주의 곡성 같다. 떨어진 가지 또한 몸부림치듯 땅바닥을 방황한다. 나무 본체와 잘려나간 가지, 이 둘의 이별은 사소한 일상이 아니다. 부모와 자식 간의 별리를 맞아 슬픔이 극에 달한 모습이랄까.

바람風은 플라타너스의 바람望을 수직으로 낙하 해 놓았다.

그러나 가만히 보면 그들의 생명이 다 한 게 아니다. 시간이 지나면 가지가 떨어져 나간 자리에는 옹이가 생기고 세월이 더하면 옹이 곁에 파란 새순까지 돋으리라. 떨어진 가지는 제 몸을 곰 삭여 향기 나는 부토로 발효되고 뿌리를 통해 올라가 다시 나무의 근육질이 될 것이다. 아이러니이지만, 그것은 나무와 떨어진 가지 사이를 오르내리며 송수신을 담당하는 바람이 있어야 가능하다. 바람은 새순에 생기를 불어넣을 거고, 가지에게는 부토가 되도록 맑은 공기를 삼투하며 일조하리라.


어느새 비바람은 우리 집 뒤뜰을 난장판으로 만들어놓고 다시 본연의 잔잔한 표정으로 돌아와 있다. 나는 부러진 가지들을 가지런히 모아서 잘게 잘라, 나무 밑에 동그란 구덩이를 파고 과수원에서 농부가 거름을 주듯 정성스럽게 묻어주었다.


바람 또 하나 :

장영희이던가. “희망은 우리가 삶에서 공짜로 누리는 제일 멋진 축복”이라고 한 작가가.

희망, 그 바람望은 플라타너스 밑둥치에 묻어둔 나뭇가지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시간을 기다리면, 나뭇가지는 제 뼈를 삭히고 살을 녹이어 물관을 타고 올라가 나무의 잎과 줄기를 더 푸르게 해 준다.

가슴에 희망의 바람이 묻어오는 날, 우리는 그 희망을 자꾸 들쳐보지 말아야 한다. 젓갈을 소금에 절여 밀봉해두고 향기 나는 젓국이 될 때를 기다리는 마음처럼, 고이 묻어두고 기다릴 때 ‘희망의 축복은 공짜’로 다가온다. 바람望의 축복을, 한차례 지나가는 선선한 바람風 기다리듯 하루아침에 기대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땅 속에 묻힌 나뭇가지는 하루를 지나고 열흘을 지나고 한 달을 지나고…, 또 1년의 시간태胎를 벗으면서 자기를 스스로 버리고 부토가 되어 나무의 뿌리로 스며드는 것이다. 생선의 뼈처럼 딱딱하던 줄기가 흐물흐물 녹아내리고, 삭고 삭아서 분말이 되어, 흙과 섞여 발효가 되고, 아무도 넘보지 못하는 향기를 낼 때, 나무의 뿌리는 그제야 그를 초대하는 거다. 그때는 이미 나뭇가지라는 이름을 버리고 부토라는 이름표를 달고 뿌리네 집 문을 똑똑 노크한다.


그렇다고 뿌리네 집 문지기는 부토를 무조건 나무의 몸체로 들여보내 주진 않는다. 분명 문 앞에 서서 부토의 품격을 체크하고 나무 본체와 영양의 코드가 맞는지도 맞춰본 후, 별처럼 총총한 수많은 날과 옥수수수염만큼 수북한 뿌리의 길 중, 그 부토만이 갈 수 있는 적당한 날, 적합한 길을 간택하여 안내한다. 자신의 과거 같은 새싹을 피울 수 있는 현능이 확인된 후에 부토로 인정받고, 또 하나의 줄기를 통해 자신의 본향으로 회귀할 수 있게 된다.

바람시 또, 또 하나 : 바ㄹ.ㅁ=바람+바람

‘바람風’이 바람 잡다, 바람나다, 바람맞다, 바람피우다, 바람 들다 라는 부정적 어투로 사용되는 건 삼척동자도 아는 일이다. 일회적이며 순간적으로 쾌락처럼 찾아오는 바람 - 風의 속성 때문이리라.

이렇게 바람風과 바람望은 같은 음성의 옷을 입고 있을지라도 ‘왕자와 거지’의 옷처럼 품격이 다를 때가 많다. 바람風이 참음이 없는 일회성으로서 그리 달갑지 않은 부정의 옷을 걸친다면, 바람望은 “공짜로 누리는 제일 멋진 축복”이라는 옷을 입는다.

자신을 내려놓고, 삭히며, 인내하고 기다리는 삶, 그렇게 불굴한 바람만이 싱그러운 새싹과 달콤한 열매를 보여 줄 터,

나의 분신인 자식을 키울 때 나를 녹이고, 나의 분신인 수필을 쓸 때 나를 내려놓을 때만이, 옹이에서 돋아나는 파란 싹 같은, 진정한 축복의 향기를 얻지 않겠는가. 하지만 아이를 키울 때나 수필을 쓸 때마다 채 시간을 채우지 못한 몹쓸 바람이 불쑥불쑥 고개를 쳐든다. 하루에도 몇 번씩 그놈들을 잠재우는 데 기진해짐은 내 안에 허상의 바람이 너무 과하게 들어 있음이다.


우리에게 안겨오는 바람의 태胎를 어떻게 품을 것인가.

창조주는 바람과 바람을 더하여 바ㄹ.ㅁ을 심어 놓았다. “두 팔을 펴서 벌린 길이”라는 뜻의 바ㄹ.ㅁ은 바람風의 불궤 하여 불길하거나 불능한 불완전성에, 바람望을 투입하여 완성으로 가도록 두 바람을 유연하게 잇는 경첩 역할을 한다.

새싹을 피워 낼 부토로 발효된다는 건, 바람風이 안겨와 바람望의 생명을 얻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누군가의 어깨를 받아주거나 타인의 상처를 다독여 줄 바람이 바ㄹ.ㅁ의 너비로 안겨오길 희원한다. 두 바람 사이에 바ㄹ.ㅁ이 있어 서로 대척적이던 바람과 바람이 상보적으로 되는 세상 이치가 따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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