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꽃은 아직 내 안에 있네

by 예나네


그녀는 고아했다.

나는 수시로 그녀를 음미했고 그녀를 자랑했다.

그러자 나에게서 그녀의 향이 배어나고 그녀에게서 내 모습이 연상되는 사이가 되었다. 그녀는 내가 아끼는 선물상자 같은, 나의 꽃이 되었다.

꽃은 자신의 깊은 속을 길어 올려 내게 전하였다. 내가 미처 생각지 못한 고밀도의 속내를 제 향기처럼 풀어놓았다.

“내 앞의 눈꽃은 순결하고 달콤한 향을 지녔지. 그런데 눈꽃 줄기에 하얀 독성이 들어 있어. … 포인세티아는 크리스마스 선물같이 설렘을 주지. 그러나 꽃이 아닌데 꽃 행세를 하는 다중인격자야. … 데이지는 사시사철 꽃 피우는 능력이 있지. 하지만 계절마다 궁상을 떨어. …”, 이런 식으로 꽃은 이웃의 꽃 모두를 칭찬하는가 싶다가 결국은 타박하고 퇴짜 놓았다. 한마디로 꽃의 마음에 쏙 드는 꽃은 없었다.


오랜 시간 곁에 살다 보면 앙금이 생기는 거라 믿었다. 뭇 꽃들에게 멍울 진 응어리를 나를 통하여 해소하는 거라 생각했다. 나는 꽃의 속내를 이해하였으며 꽃의 속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꽃의 언변에 감정 이입하다 보니 이제 내게도 뭇 꽃들이 식상해 보였다. 시나브로 뭇 꽃들과 나의 관계가 소원해지고 있었다.

나는 아침마다 나의 꽃을 쳐다보았다.

지상 3미터의 벽돌 속에다 뿌리를 박고 우리 집 외벽을 꽃피우는 나의 꽃. 그녀는 화려하면서 숭고해 보였고 고귀하면서 겸손으로 떨었다. 땅이 전부인양 땅 내음을 숙명으로 맡으며 땅에서만 생명을 묻어가는 뭇 꽃들을 초극하여, 고도의 외벽을 장식하는 이 꽃만이 지고지순한 품계를 지니고 있었다.


나는 시골 할머니가 금가락지를 세듯, 꽃송이를 헤아리며 하루를 시작했다. 진보랏빛 꽃대 셋. 두 개의 꽃대는 위쪽을 향하고 하나는 땅을 향해 숙이고 있다. 숙인 가지는 뭇 꽃처럼 환하나 위로 꼿꼿이 세운 가지는 피곤으로 부르튼 입술처럼, 끄트머리가 까칠하게 메마른 모습이다. 마치 겸손한 자와 교만한 자로부터 나오는 인상의 차이 같기도 하다.


꽃 대궁을 줄자로 재어 보니 가장 긴 가지가 87센티미터다. 꽃 대궁이 이만큼 자라려면 벽을 헤집고 내려간 뿌리의 고독 또한 이에 버금가는 깊이일 것이다. 그 대궁에서 함박눈 같은 꽃, 열세 송이가 피어났다.

꽃은 점점 환하게 피어났으며 줄기는 도톰하게 자랐다.


밤이면 미물도 보금자리를 찾는데 꽃은 번데기처럼 깜깜한 시간을 거꾸로 매달려서, 견디며 벽을 꽃피웠다. 외벽을 보초 서듯 찬바람 속을 일렁대면서도, 꽃은 피어나고 있었다. 흙 한 줌 없는 가파른 벽에 뿌리를 걸고, 이토록 고운 꽃을 꽃피운 꽃의 생명력에 탄복한 나는 우리 집에 손님이 오는 날엔 내 꽃을 자랑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벽에 머리카락 같은 금을 보게 되었다. 꽃의 뿌리로 인해 벽에 틈이 생긴 것이다. 실금이 보일 때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였다. 고생대의 지층처럼 꽃의 뿌리도 벽 속에 패각으로 묻히겠지, 하였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잘 익은 수박에 금 간 듯이 바람 술술 불러들이는 균열로 변했다. 깨진 호두 껍데기 모양으로 갈라지는 외벽은 찢긴 가슴을 아픔으로 호소하는 듯하였다.

꽃이 벽을 무너뜨릴 거라고 손님은 귀띔했다.

나는 진즉에 꽃을 쳐내어야만 했나 보다. 꽃의 미려하고 가녀린 외모에 내가 갇혀 있었나 보다. 그녀가 눈꽃의 독성과 포인세티아의 이중성과 데이지의 지지함에 관하여 이러쿵저러쿵 할 때, 그 뿌리를 단호히 잘라내야만 했다.


나 자신과 꽃 그리고 모든 생명체는 허점투성이라는, 뼈아픈 진실 앞에서 내가 먼저 마음을 열어야만 했었다. 그랬으면 꽃과 내가 뭇 꽃들과 멀어지지도 않고, 꽃과 벽 사이가 이만큼 벌어지지도 않았을 것을.

이제 꽃의 뿌리는 벽속에서 바삭바삭, 건초가 되어간다. 뭉텅 잘린 꽃 대궁은 저만치에 물러나 있다.

지순한 꽃의 속성을 초월했던 꽃이었는데 나는 내 꽃의 속내를 속속들이 꿰지 못하였다. 밤마다 이슬의 집이 되고 별똥을 담던 꽃의 선한 가슴에, 뿌리의 파괴성이 숨어 있다는 양면성을 까맣게 놓고 있었다. 벽을 무너뜨릴 무모함이 질병같이 번지던 섬뜩한 악성의 음모를 상상하지 못했다.

화려한 꽃송이만 세고 있었기 때문이다.


씨앗을 흙 속에 묻지 못하여 뭇 꽃들과 어우렁더우렁 어울리지 못하고, 쟁기질도 안 되는 벽돌 속으로 뿌리내렸던 나의 꽃. 그 벽을 들어 올려야만 생명을 부지할 수 있었던 나의 벗. 나는 좀 더 일찌감치 그 꽃의 뿌리를 지상으로 옮겨 심어 물을 흠뻑 뿌려주고 흙을 자근자근 덮어주어야만 했었다.


어쩌면 꽃은 칠흑 같은 벽 속의 절대 고독을 견디다 못해서 열세 송이의 꽃을 피게 했는지도 모른다. 거친 세상살이의 벽같이 딱딱한 외벽을 뚫어 꽃을 피우자니 꽃, 그녀의 속내는 얼마나 궁핍했을까.

돌덩어리 속으로 뿌리를 내리며 하얗게 외벽을 꽃피우던 내 꽃의 잔상이, 아직 나를 떠나지 못하고 내 안에서 하늘하늘 춤춘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동그라미의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