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책을 읽다

자신을 이긴다는 건

- 조지 오웰의 『1984』를 읽고

by 예나네


둘째 아이도 직장을 잡는 데 꽤 오래 매달렸다.

‘취업’이라는 만져지지도 보이지도 않는 헛것 같은 명사를 거머쥐기 위해, 하루 수십 통의 전화를 돌렸다. 인터뷰를 오라 하면 공처럼 튀어 나갔다. 서류를 보완하라 하면 하녀처럼 순응하였다. 아이에게 ‘취업’이라는 단어는 마치 존재하지 않으면서 군림하는 조지 오웰의 빅브라더 같았다. 아이는 ‘취업’이 무서운 괴물 같다고 했다.

때론 전화, 가끔은 이메일, 더러는 직접 만나서, 괴물은 아이를 제 의지대로 조종하였다. 귀찮고 피곤하고 유치하게 굴어도 아이는 괴물에게 순종했다. 인터뷰 자료를 인터넷에서 뽑아 달달 외우고 다녔다. 괴물은 아이 속에 든 성정까지 감시하고 통제하면서, 아이에 관한 정보를 속속 꿰어 찼다. 아이는 괴물이 요구하는 것에 곧바로 대처하기 위하여, 친구들과의 모임이나 여행을 우선멈춤으로 해놓고, 오직 괴물이 시키는 대로만 했다.


가만히 보니 우리 아이뿐 아니라 아이의 동기생들도 마찬가지였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괴물에 딸린 감자알같이 주르륵 매달리는 것을 보면서 나는, 괴물이 취업준비생들을 모아 어떤 비즈니스라도 오픈만 하면 대박 날 것 같았다. 괴물이 떴다 하면 절대 순종하는 이런 ‘자발적인 전체주의’를 나는 본 적이 없다.


괴물도 등급이 있어서 일급 괴물을 잡기 위하여 한국에서는 인터뷰 보는 법이나 이력서 쓰는 방법을 가르치는 학원이 있다고 한다. 이곳 호주에는 아직 거기까지 가진 않았다. 경비가 절감되니 다행이다. 그럼에도 호주 또한 괴물을 잡을 문이 좁아진 건 사실이다. 괴물은 이제 지구촌의 실업청년들을 통제하는 거물이 되어있는 것 같다.

우리 아이 같은 외국인이 호주 괴물을 잡는 건 더 난해하고 복잡해서, 나도 합류하여야 했다. 합류라고 해봤자 빅브라더의 하수인인 사상경찰 같은 역할을 맡는 거다. 즉, 아이가 잡생각을 갖지 못하도록 감시하고 재촉하는 포지션이라고 할까.


아이는 평소 순하고 성실하다. 그러나 숲은 멀리서 볼 땐 싱그러운데 가까이 가보면 벌레 먹은 잎들이 많이 보이듯, 괴물을 잡는 아이의 자세는 내 마음에 썩 들지 않았다. 조용히 괴물에게 전화를 걸고는 조심스레 끊고 마는. 낮달처럼 공허한 모습으로, 괴물이 제 발로 뚜벅뚜벅 걸어오기만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이런 자세로는 영영 잡지 못할 것 같았다. 내가 한 마디 거들고 싶었다. 그러나 안 그래도 사기가 저하되어 있을 텐데, 잘못 거들다간 오히려 괴물 꼬리도 못 만지고 말 것 같다. 38도의 푹푹 찌는 날씨 속에서 냉수를 들이키며 아이의 괴물이 잡히기만을 기다리기로 했다.

두 달 반이 지나도 아무런 진척이 없다. 절친한 동기생 둘은 이미 괴물을 잡아서 동거에 들었다. 2월 말까지 못 잡으면 아이는 비자 문제로 귀국해야 한다. 속이 탈 텐데도 아이는 고요하고 잠잠하다. 그럴수록 내 속은, 윈스턴이 영국 사회주의 체제에 대해 의문과 저항심을 품을 때만큼, 갑갑증이 난다. 뾰족한 대안도 없다.

시간이 갈수록 아이를 다그쳐볼 마음이 목 언저리까지 차오르는 건,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마음을 잠재우려 하면 할수록, 엄마라는 자리에서 받는 지독한 심적 고문은 더욱 심해진다.

“난 안돼요. 줄리아에게 해요.”

임계점에서 물이 끓듯이, 인간의 정신에도 한계점이 있는 모양이다. 허기진 쥐들한테 물어뜯기는 지독한 고문을 당하던 1984년의 윈스턴은, 사랑하는 줄리아를 철저히 배신하고 만다. 그런데 이 잔인한 말이라도 내뱉지 않았다면, 그 자리에서 그는 숨이 컥 멎었을 거다.


백일이 다 되도록 괴물을 잡지 못하는 아이에게 ‘넌 어쩜 그리도 못나고 바보 같으니!’ 나는 꽥 소리 지르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순 없다. 지금, 학교에서 사회로 넘어가는 첫 발디딤이 아닌가. ‘첫’이라는 이 순수. 얼마나 고귀하던가. 그저 아이를 향해 조금 불편한 미소만을 조용히 보내야 했다.


시간이 찰수록 이번엔 어디라도 가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 !’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새들과 바람 같은, 온 주변을 다 둘러보아도 나를 감시하는 빅브라더들이 턱 가로막고 있어 그것마저도 통제되었다.

목구멍으로 삼키려는 말들이 제대로 넘어가지 않을 때, 아니 좀더 솔직하게 표현한다. 즉, 내 아이가 저토록 고생하는 걸 지켜보는 어미로서 내 아이에게 딱히 해 줄 수 있는 게 없을 때, 두드러기가 나는 걸 그때 알았다. 얼굴의 가려움증이 번지면서 나의 온몸에 종기가 벌겋게 돋아나고 있었다.

‘101호에서 쥐 고문을 당하던 윈스턴의 몸은 얼마나 피폐해졌을까.’


아이와 나는 오랜동안을 더 고문당했다. 그러다 괴물 세 마리가 한꺼번에 걸려들었다. 아이 혼자서 세 마리를 감당치 못하니, 그중 두 마리는 누군가를 위하여 제 자리에 돌려놓았다.
그래, 참 어렵사리 취업이 되었다.


“싸움은 끝났다. 그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했다.”


완벽한 거짓말은 더 이상 거짓말이 아니며, 완전한 거짓말은 자신마저도 세뇌된다는, 가슴 저려오는 이 이중사고를 누가 창안했던가. 비열한 내부 고발자 오브라이언의 천박하고 존엄한 고문에 의해, 이중사고를 완성하고서야 오웰의 윈스턴은 총살당한다.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이라는 이 말도 안 되는 당의 논리를, 저항의식 없이 순순히 받아들인 채.


이처럼 『1984』의 결말은 말이 안 된다. 그래서 아프다. 오웰이 나약하고 속된 인간을 반어적으로 쓴 결말이.
아마도 그는 미래엔 말이 되게, 자신을 기꺼이 이겨내어, 만인이 고루 평화를 이루어 살아내기를 바라며 그렇게, 1984를 적어내려갔을 것이다.

세상 모든 아들딸들의 실업률 또한, 제로가 되길 바라면서 썼을지도?.


* 이 글은 2014년도에 쓴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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