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모든 것의 시작은 위험하다. 그러나 무엇을 막론하고, 시작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는다.”라고 한 니체는, 산 정상을 올라가며 겪는 고통의 경험을 중요시했다. 산 밑에서 정상에 올라가는 것을 두려워할 때, 즉 땀 흘리는 고충에 대한 힘에의 의지가 결여될 때 성공은 없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그는 산 정상에서 산 아래의 풍경을 총체적으로 내려다볼 수 있듯이, 사고하는 인간의 통찰력 또한 산을 오르는 고통을 통과하지 않고는 획득될 수 없다는 것이다. 정원사의 마음으로 자신의 곤경을 돌보아야 한다는 거다. 사려 깊은 재배를 통하면 분노, 동정, 허무감의 뿌리에서 예술, 미, 사랑의 열매가 맺힌다는 거다.
누군가 니체를 ‘꿍꿍이 철학자’라 칭한다.
상대방의 질문 속에 무슨 꿍꿍이가 담겨있을지를 파헤쳐서 되묻는 철학자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우린 왜 돈을 벌까’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니체는 단순한 응답에서 멈추는 일이 없다. 누군가가 한 그 질문을 뒤집어엎는다. 즉 ‘이 사람은 왜 내게 이런 질문을 할까’라는 의구심을 품는다. 지배하는 자의 힘을 능가하는 힘의 의지가 내게 있을 때, 나는 그 지배자에게 무조건 지배당하지 않는다는 거다. 그러한 힘의 의지의 관계는 부모와 자식, 리더와 구성원... 의 관계에서도 볼 수 있다.
니체, 그가 의도하는 철학의 뿌리는 삶과 유리되는 게 아니다.
삶 속에다 자신을 투입하여 실체적 사고를 지향하는 힘의 의지가 그의 내면에서 똬리를 틀고 있다. 산 밑으로부터 고통을 감수하며 정상궤도까지 오르는 결과에만 만족하지 않는다. 그 고통의 '과정까지 포함'하여 그는 ‘완성’이라 부른다.
실제로 니체는 10여 년 간 산속에 살면서 산을 사유하고 삶을 부대끼면서 글을 썼다. 알프스 지역 해발 1800m 질스 마리아라는 작은 마을에서, 새벽부터 정오까지 글 쓰는 노동을 하고 오후엔 산을 오르곤 했다. 훗날 그곳은 니체 박물관이 된다.
호주 울룰루 에어즈 록의 일부
2.
사고력이라 함은, 기원전 469년 석공의 아버지와 산파이던 어머니로부터 태어난 소크라테스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아테네 광장에서 지인들과 담론을 즐기며 시간을 보낸다. 이 주먹코의 못생긴 맨발의 철학자 또한 인구 24만이던 따스한 도시를 돌며 고정된 관념을 뒤집는다.
비록 당대에 인기 있는 국가 사안들이라 해도, 그것을 맹목적으로 흡수하지 않았다. 그것이 이치에 맞는 것인지 거듭 의문을 제기한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삼십 분 안에 고정관념이 깨어지고 새로운 아이디어가 생성될 거라고, 누군가는 말한다.
그러나 그것이 그의 입장에선 ‘심오한 탐구’이나 당대의 지배층 사이에선 ‘상식을 광적으로 의심한다는 비난을 받는다.’ 결국 시인, 정치인, 웅변가가 합세한 세 명의 시민이 소크라테스, 이 철학자를 고발한다. 500명의 배심원 중 220대 280의 투표로 유죄를 선고받은 그는 독미나리 즙 사약을 마신 후 ‘마음의 평정을 찾고 담담히’ 세상을 떠나게 된다.
배심원 중엔 돈 때문에 나온 노인과 상이군인이 상당수 있었다고 하니, 그때도 돈이 환幻이었나 보다.
스승 소크라테스가 죽을 때 플라톤은 29세였다. 스승은 출판된 저작이 없지만 플라톤이 쓴 『라케스』와 『메논』에 드러난 그의 논법은 지금의 작가들에게도 귀감이 될 만하다.
그가 아테네에서 촉망받던 라케스 장군에게 ‘용기란 무엇인가’를 질문했을 때 그 장군은 ‘전쟁에서 끝까지 물러서지 않고 참여하는 것’과 ‘인내’라 답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후퇴했다가 재도전하여 승리한 자를 들어 반박한다. 그때 둘의 논쟁을 지켜보던 라케스의 친구가 “용기엔 지식, 즉 선과 악에 대한 인식이 필요하고, 용기를 전쟁이 국한해서는 곤란하다는 의견”을 제시했는데, 이는 소크라테스의 철학이 당대에 이미 세상으로 번지고 있었음의, 간접 증거라고 한다.
『메논』엔 상식적 관념을 뒤집는 대화가 나온다. ‘덕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귀족 메논은 ‘덕이란 돈, 건강, 재화, 황금, 은 같은 종류’를 들었다. 하지만 이에 소크라테스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그것들을 정당함과 정직함으로 얻지 못했을 때 미덕이라 부를 것인지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했으니, 귀족 메논의 입장에서는 꽤 난처했을 게다.
이처럼 ‘진리’와 ‘논리의 법칙’을 토대로 논쟁한 이 철학자는 최후의 순간까지 벗에게 “가장 용감하고 현명하고 고결했던 존재”로 기억되었다.
3.
요즘의 베스트셀러 작가, 알랭 드 보통은 어떤 방식으로 사유의 정원을 가꾸고 있을까.
“다양한 인간형과 성격들을 포착하고 묘사해야 한다. 일상의 모든 일이나 사물을 다른 것과 연결 짓고, 또 그런 것들을 야기하는 결과에도 귀를 늘 열어두어야 한다”는 그의 단편적인 사유방식만 엿보더라도, 위의 두 철학자의 열린 사상과 연계되지 않는가.
그는 “인간 행동의 동기에 대해 숙고하고, 그런 동기를 말해주는 단서를 절대 무시하지 말 것이며(이는 니체의 거꾸로 묻는 질문 방식과 유사하다.) 밤낮으로 이런 사소한 것들을 수집해야 한다.(소크라테스가 질문한 빈대의 높이뛰기까지에 대하여 자로 재려는 좀 엉뚱한 사고방식과 어울리지 않는가.) 이 같은 다각적인 연습을 ‘10년 이상 게을리하지 않는 끝’에 탄생하는 작품이 세상에 내놓아도 좋을 만한 수준이 될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이처럼 글쓰기는 고통이 수반된다는 거다.
인생이 고통이라는 그는, 인생 완성에 필요한 요소들은 아무런 힘을 들이지 않고는 두루 갖출 수 없기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고 하였다. 이는 니체의 다음 말과 궤적을 같이한다. “죽음을 다루면서도 삶에 대한 자극이 되는 양서가 있는가 하면, 생명을 주제로 하면서도 삶을 나약하게 만드는 해로운 책이 있다. 그 차이는 책에 담긴 ‘삶의 자세가 어떠한가’에 의해 가늠된다.”는.
알랭 드 보통은 곤경, 고민, 시기하는 마음 같은 것들을 ‘감정의 잡초’라 생각하고 무조건 제거해버리는 것을 지적한다. 그리고 긍정적인 산물을 이렇게 정의 내린다. 부정적이던 것이 ‘성공적으로 다듬어진’ 결과라고. 부정적인 뿌리들을 모조리 잘라버리는 건, 그 뿌리로부터 비롯될 수 있는 긍정적인 요소들까지 질식시켜, 한참 자란 그 식물의 줄기를 없애버리는 것이라고 그는 또 인식한다.
자신의 곤경에 대해 당혹할 것이 아니라, 그 곤경을 아름다운 그 무엇인가로 일구어나가지 못하는 그 사실에 대하여 당혹해야 한다고, 알랭 드 보통, 그는 주장한다.
결.
소크라테스가 ‘벼룩은 자기 몸길이의 몇 배나 높이 뛸 수 있을까’에 의문을 품었던 건, 가난하던 그 철학자의 집에 벼룩이 득시글거렸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고의 동기는 멀리서 촉발되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사소한 것들 틈에서 득시글 거리고 있다.
글쓰기는 결국 작가의 사유를 글로 전하는 작업이다.
작가에게 내재된 감성, 지성, 철학은 내적 지문으로 작가의 언어의 줄을 타고 글발로 딸려 나온다. 어떤 형식과 내용이든, 작가의 사유를 언어의 두레박으로 퍼 올리기 위해서는 작가의 내면에 사유의 탱크가 넉넉한 마음과 정신의 부자여야겠다.
이상 위 세 명의 사유의 산들을 가볍게, 내 글쓰기의 정원에 초대하여 보았다.
그들이 어떤 방법과 어떤 마음바탕으로 사유의 성을 쌓아 올렸는지를 살펴보고 그것을 거울로 삼기 위함이다.
그 결과 그들에겐 진정성이 있되 자유롭고, 한 곳을 직시하되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또한 누군가의 질문을 거꾸로 뒤집는다. 즉 고착된 고정관념에다 변환의 키 key를 지속적으로 작동시킨다.
니체는 고통에 지배당할까 두려워 산 밑에만 머문다면 창조력이 절정(산꼭대기)으로 나아가지 못할 거라 한다. 실패와 성공 사이에는 고통, 고뇌, 부러움, 굴욕감의 영역이 콘크리트처럼 존재한다고 말한다.
소크라테스, 그가 죽고 난 후 아테네의 침체된 사고가 바뀌었다. 그를 고발한 세 명은 사형과 유형에 처해지고 아테네에 소크라테스 동상이 세워진다.
알랭 드 보통은 10년간 다각도로 사유하고 치밀한 문장 수련을 한 후에야 글을 세상에 내놓을 때, 그때서야 비로소 작가로서의 면목이 선다고 피력한다. 작가의 길이 이리도 멀다. 그래서 도전하며 쓴다.
사유의 여행지인 고산지대로 오를수록, 공기가 희박하여 숨이 찰 것이다. 그러나 그 희소성의 절실함을 독자들은 즐겨 찾으니 작가는 그만큼 먼 사유의 산을 오른다.
산이 높은 만큼
깊은 계곡을 본다는 희망을 갖고,
고산지대라도 올라가
볼까, 말까.
그건, 글을 쓰는 자의 자유다.
그리고 능력이다.
* 참고서적 :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 생각의 나무, 알랭 드 보통.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