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책을 읽다

보라, 그 낭만

by 예나네


하동골 벚꽃인가.

봄빛 속을 하르르 날던 분홍 꽃잎들.

그가 바다 건너 산 넘어 호주 브리즈번에 왔는가.

먼 길 오느라 분홍이 보라 빛으로 물들었는가. 낮밤 쉬지 않고 오느라 꽃마다 길 밝히는 초롱, 초롱을 달았는가.

형광의 보라 꽃을 구름처럼 피어 올리는 호주의 봄꽃 - 벚꽃나무보다 큰 체형으로 젊은 초록의 숲에 에워싸여 낭만한 풍채로 서 있는 자카렌다를 볼 때마다 나는 자카렌다, 그가 경외로워 진다. 일 년에 단 한 번, 한 달여 동안 점점 더 귀색으로 개화하는 이 꽃은 사시사철 피다지다 하는 호주의 뭇 꽃과는 다르다.

꽃 자체에서 찬탄을 자아내기보다는 아낌없이 발산하는 보랏빛 색채가 주는 정형 혹은 율동의 신선한 파격 때문에 한 번 더 눈길이 쏠린다. 허공을 정제하는 연보라색 그를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신성한 미감을 체험하기도 했다. 하동의 벚꽃이 분홍의 대표주자라면 자카렌다는 보라의 대표 격이다.

자카렌다 - 보랏빛.


멀리서 바라보면 형광 빛 보라의 현란함이 휘모리장단으로 다가오고, 가까이 가보면 꽃송이 전체를 툭툭 떨어트리는 단조의 운율이 느껴진다. 비늘 같은 잎, 한 잎 한 잎 흩날리는 벚꽃에 비해 슬쩍 한 송이 꽃잎이 통째로 떨어지는 모습에서 동백의 피울음은 아니더라도 가슴 쓸어내릴 애수가 감돈다. 아쉬운 듯 바람을 비껴 낙화하는 모습이 흐느낌 같기도 하다. 떨어지는 ‘꽃짓’ 속에 절제와 지엄이 엿보이기도 한다.

우미하며 차분한 모습에서 꽃송이가 하나씩 버려지는 걸 볼 때마다 그에게서 생의 연륜이 깊은, 지천명에 접어든 남성성이 떠올려진다. 하동골 벚꽃이 지천명의 화사한 여성이라면 내가 호주에서 만난 자카렌다 꽃은 지천명의 경외할 남성이라 할 만하다.

하늘 쪽으로 카메라를 들어 올리자 초롱꽃, 그가 나의 렌즈 속으로 쏙 들어온다. 줌을 늘려서 그를 내게 가까이 오게 해본다. 바싹 다가온 그가 바람에 흔들, 흔들리고 있다. 바람은 내 오감을 자극하기에 알맞은 그의 향취를 실어다 준다. 카메라를 내 가슴께로 안아본다. 그와 나 사이가 밀착된듯하다. 렌즈도 센시티브 해진다. 렌즈 안으로 들려오는 그의 속삭임까지 포착하여 내게 전해준다.

“내 보라를 담고 싶소?”

그가 질문했으니 내가 답을 해야 한다.

하지만 이 꽃짓이 하는 행위에 내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바르르 몸이 떨린다. 이보다 더 정(淨)하고 이보다 더 비애로운 물음이 있을까. 카메라 렌즈 속에서 관능 시의 도드라진 주체가 된 그와 나 사이의 거리감이 느껴진다. 밀었다 당겼다 하는 바람의 결에 순응하는 그의 태도가 보랏빛 오르가슴으로 물결치는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카메라 셔터를 바로 누르지 못하고 그의 은밀함에 빠져 든다. 숨죽이며, 처음 찍어보는 카메라의 렌즈를 상하좌우로 조심스럽게 돌려 본다. 그러다 보니 내 몸에 땀이 흠뻑 배었고 그의 향취는 더욱더 농 짙어져 있다.


- 그의 세포 증식에 나도 한몫했는가.


아직은 자신의 이미지를 끓임 없이 농 짙게 피워내고 있는 꽃잎이지만 그들은 이제 한 달이 지나면 홀연히 떨어질 것이다. 이 꽃잎이 다 떨어지고 나면 나는 뭔지 모를, 확연히 잡히지 않을 상실감과 그리움으로 마음이 저려올 것이다. 곁에서 생명을 감지할 수 있었던 이 꽃의 실체를 그리워할 것이다.

셔터를 누를까 하다가 내 안에 그를 담기로 했다. 내 안에 그의 생명 그대로 담기로 했다. 나의 이 시간도 함께 담기로 했다. 호두 껍데기 안에서 무한한 우주가 만들어지듯이, 내 찰나의 시간을 영원으로 담기로 했다.

보르헤스는 그의 단편 <알렙>에서 우리들 정신에 망각으로 뚫려있는 수많은 구멍들이 있다고, 세월이라는 슬픈 풍상 작용 속에서 베아뜨리스의 모습을 변질시키고 상실해가고 있다고 하지만 나는 자카렌다, 그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간 나의 영혼을 변질시키지 않기로 했다.

내년에 또다시 피어날 보랏빛 그날을 꼬박 기다리기로 했다. 1년이 하루로 축약되는 그 날이 되면, 그는 또 하동 골의 묘음과 단조의 운율을 지니고서 내가 있는 호주 브리즈번으로 다시 올 것이기 때문이다.

쉼표처럼 허공을 떨게 하던 그 꽃 한 잎, 또 한 잎, 내 안에다 생생하게 심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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