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책을 읽다

‘바다차’의 미학

- 조지훈 <돌의 미학>을 읽고

by 예나네


조지훈 님의 수필을 읽다가 길을 나섰다.

‘풍상을 사람과 같이 겪어오면서 변하지 않는 정다운 바위가 있다’고 해서 그 바위를 찾아 나서 보았다. 조지훈 님은 이 바위를 숲길에서 볼 수 있다지만 나는 청개구리처럼 바다 쪽으로 향했다.

이국의 외진 바다는 곁에다 조약돌 가득 깔린 맑은 개울 하나를 안고 있었다. 두서너 살쯤 되어 보이는 푸른 눈의 아기가 하얀 몸을 물속에 담그고 웃고 있었다. 아기의 언니, 그리고 엄마는 물장구를 재미나게 치고 있었다. 그들을 에워싼, 선이 동그스름한 바위와 돌들은 묵묵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나는 그 주변을 바장이며 조약돌을 모으기 시작했다.

조약돌도, 내가 가끔 앉아보는 바위도, 바다의 바람과 물결에 씻기고 깎이면서 부동자세로 좌선을 하는 중이었다. 몇 만 년을 그래 왔을 텐데, 아직도 돌은 더 다듬어야 할 시간이 필요한 듯하였다. 풍화되고 또다시 풍화되는 것은 돌의 숙명인 듯했다. 고요함 속에 돌 한 개 한 개의 독자성을 확보하면서, 돌은 자신의 완성도를 높여가고 있었다.

조지훈 님은 일본 정원에서 본 돌의 정적 미에 이끌려 사념의 촉수를 이리저리 비약하였다고 한다. 그는 ‘낙목한천(落木寒天)의 이끼 마른 수석(瘦石)의 묘경을 모르고서는 동양의 진수를 얻었다 할 수가 없다’며 인고의 세월을 묵묵히 견뎌온 돌의 오묘한 멋을 찬미한다. 돌에 생명을 부여하며 돌에 동화되고 돌에다 자아를 투사하기도 하는 그의 수필을 읽다가,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 ‘피레네 산맥의 성채’에서 허공을 떠다니는 돌을 떠올리게 되었고, 요즘은 두 작품을 번갈아 보면서 새로운 맛을 느낀다.


조지훈 님은 돌을 관통하며 돌을 칭찬한다면, 마그리트는 돌을 바다 위의 허공에 붕 띄워놓아 부유하는 인간의 욕망 덩어리를 생각나게 한다. 돌을 오브제로 한 두 작품은 견고한 내 의식의 성채를 창의적으로 전환하는 데 일조한다.

‘찻종에 넣는 작은 나무 국자를 찻종 전에다 땅땅땅 두드려보며 벌목 정정(伐木丁丁)의 운치를 느낄 수 있고, 찻주전자를 높이 들고 소리 높여 물을 따르면서 산골의 폭포 소리를’ 들을 수 있게 한다. ‘적연한 가운데 뇌성벽력을 듣고, 눈 감은 가운데 거문고를 타게 한다.’ 조지훈 님이 선을 수행하면서 돌의 맛을 발견한 그 공간의 적요함이 곧, 돌이 뿜어내던 돌의 향기였으리라.

숲 속 정원이 느껴지는 <돌의 미학>에서 ‘피레네 산맥의 성채’로 시선을 옮겨보면 시각적으로 탁 트인 바다가 기다린다.

돌을 찬미하는 시인묵객은 더러 보아왔지만 돌을 대책도 없이 공중에다 띄워놓은 예술을 대하기는 처음이다. 구름 속으로 커다란 바위가 떠가는 그림을 즐겨 보다 보면 그 속에서 바다의 소리, 구름이 흘러가는 소리가 들린다. 그렇지만 바위 꼭대기에 세워진 성(城)의 모습에서 인간의 고독한 실존을 본다. 높고 장엄해 보이는 성(城)은 겉모습만 화려한 뭇 인간의 쓸쓸한 실체인 듯싶다. 그래서인지 마그리트의 풍경에서는 시원한 반면 허허롭고 육중한 삶의 무게도 느껴진다.

‘바위 군락’과 돌무지를 만났던 그곳, 바닷가 개울에서 모아 온 조약돌을 현관 앞에 놓아두고 들며 나며 귀에다 대보며 바닷소리를 듣는다. 손으로 만지작대고 볼에 문질러보기도 한다. 닳고 닳아 순하디 순해진 조약돌에서 느껴지는 영겁의 시간을 가늠하다 보면, ‘생명감의 무한한 파동이 바위보다 더한 것이 없고 돌의 미는 영원한 생명의 미’라는 조지훈 님의 추상이 전해온다. 르네 마그리트의 서구적 낯섦, 조지훈 님의 동양적 사고의 깊이로써 내 진부하고 견고한 의식의 성이 조금씩 부수어져 내린다.

오늘은 나 자신도 좀 더 낯선 퍼포먼스가 하고 싶어 져서 궁리 끝에, 조약돌을 커피 잔에 넣어서 커피 대신 ‘바다 차’를 만들어 마시기로 했다.

먼저 조약돌 세 개를 바다 물결이 어루만지듯, 염주 알 굴리듯 동글려가며 씻는다. 물기는 행주로 닦지 않고 잘 든 햇살에 자연 증발되기를 기다려서 커피 잔에 담는다. 투명한 흰빛 돌, 흰 바탕의 줄무늬 돌, 조개껍데기가 화석으로 박힌 푸른 기운이 도는 회색의 돌은, 바다의 사리다.

수만 년 동안 바다와 생사고락을 같이 한 돌이다. 바다에 오롯이 잠겨 있던 시간으로 바다가 된 돌이다. 조지훈 님의 돌에 피가 돌듯이 커피 잔에 담긴 이 돌 속에는 바다의 해조음이 돌고 있으리라. 물속에 담그면 바닷물이 금방 파랗게 우러나오리라.

그러면 나는 피레네 산맥의 성채, 그 그림을 탁자 앞에 배치하고 돌의 미학에 빠져들면서 이 바다 차를 마시는 거다. 조지훈 님이 바위가 되었으나 내 몸은 바다가 되는 거다. 산호와 해초가 살아 숨 쉬는 푸른 바다. 처음에는 물 한 방울로 시작한다는 망망한 바다.

조약돌 위에 냉수를 부어서 잠시 기다렸다가, 두 잔의 바다 차를 연속으로 들이키자 바다향이 내 안으로 주사액처럼 퍼지면서, 내 안은 푸른 바다로 넘실댄다. “아, 이 맛.”

그러나 이를 보고 있던 나의 세 아이들이 의아한 듯 킥킥 웃는다.

그들은 ‘바다차’의 미학을 아직 몰라서 그럴 게다.



* 2011년 어느 행복한 날에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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