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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나네 Dec 14. 2023

시간의 서랍

일찍이 이러한 '인간의 시간'에 대해 깊은 통찰을 가졌던 이가 아우구스티누스(354~430)이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B.C.384~322)가 시간을 파악했던 것처럼 과거 •현재 •미래로 분산되어 무한히 흘러가는 '물리적인 것'으로 파악하지 않고, 하나의 총체적 통합체로서 파악했다. 그 안에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각각 기억과 직관과 기대로 존재하고 있는 '심리적인 것'으로 인식했다. 마음 안에 시간이 있다는 것이다. 즉, 과거는 '기억'으로서 현전하고, 현재는 '직관'으로서 현전하며, 미래는 '기대'로서 현전 한다.  - 《고백록》, XI p.23~24, 김용규, 같은 책 <솔라리스> 편 p139.


나의 청춘시절 여든이 지나신 할머니는 낙상을  후 불현듯 앞이 보이지 않으셨다.  그때 눈을 그대로 뜨고 계심에도 앞이 안보이신다는 할머니의 현실에 이해되지 못했다. 소위 우리 마을의 선비던 할아버지는 큰집 사촌언니가 놓고 간 근 개다리소반을 받아 할머니가 뜬 수저 위에다 반찬을 올려주곤 하셨다. 홍아, 할가 오늘은 마이 먹었다, 하며 할배는 지긋이 웃으셨고, 그 말씀에 할매도 하얀 이를 드러내며 수줍은 소녀처럼 웃다. 쇠죽솥이 걸린 할매할배가 거주하시던 사랑방 아궁이엔 흰 두루마기를 걸친 큰아버지가 마른 콩깍지로 불을 때어놓아서 구들장이 항상 뜨끈뜨끈하였다.


그럼에도 겨울철엔 언제나 쇠로 된 화롯불이 방 가운데에 놓여있었다. 아침마다 불을 갈아드리는 일은 사촌언니 담당이었다. 우리 집에서 2, 3분 찬 겨울을 뛰어와서 그때만 해도 드랍던 나의 두 손을 입으로 가져가 호호 불면, 눈먼 할매가 따끈한 손으로 내 손을 꼬옥 만지곤 하셨다. 그때마다 할매의 온마음이 내게 전해오곤 했다. 한결 평안 같던.


어느 날은 그 따끈함에 내 볼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었다. 돈과 온기가 궁하던 우리 집에 할머니의 따끈한 손은 내 심장을 건드 때가 있었다. 당시 나의 살아가 사정은 외형만 초록이지 뿌리밑은 돌무지뿐이라, 뻗어나갈 흙을 찾기만도 바쁜 형국이었다. 홍아, 오늘도 부지 술 마셨어? 하시던 할매의 그 깊으나 짧은 질문 사이에서,  대답은 주저하였다. 때로 할머니의 희고 마른 얼굴에서 물기가 촉촉하였다. 난 소매 끝으로 얼른 내 눈 닦아서 물기를 감추었고, 아니,라고 했다. 젊은 째 며느리를 먼저 보내고 나서 남은 손주들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할매는, 내게만 특별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니 할매와 나 사이의 깊이에도 한계가 있음이, 어린 나에게도 감지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할머니를 떠올리면 늘 따끈한 화롯불과, 구수한 구운 고구마와, 달콤하고 말랑한 곶감과, 윗목에서 주렁주렁 달려있던 메주덩이들의 기억이 좋다. 그 시간의 서랍 안에는 계란꽃처럼 환한 할머니 얼굴과 마루 끝에 내려앉은 한 주먹의 햇빛이 있다. 을 볼 수없었던 할매처럼, 의 미래에 대한 기대 또한 확연히 짚히는 건 없었지만, 할매 앞에 놓인 화롯불쏘시개로 별빛 같은 불기를 만지작대다 보면 현재의 시간이 금방 미래의 것이 되어갔다.  모진 시간 사이에서 청춘은 여전히 푸르고 뿌리는 깊이로 다.


"나는 사랑만이 세계를 구원할 수 있다고 믿는다. 사랑이 없이는 모든 것이 끝장이다."  
- A. 타르코프스키 - 김용규, 같은 책 <솔라리스> 편 p.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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