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잔의 술.
나는 술을 즐겨 마신다.
이 말은 예전에는 별다른 설명이 필요 없었지만,
이제는 가끔 이유를 덧붙여야 할 것만 같다.
술을 마신다고 하면 누군가는 건강을 걱정하고,
누군가는 습관을 묻는다.
하지만 내게 술은 중독도, 허세도 아닌
오래된 시간을 불러내는 하나의 방식이다.
젊은 시절의 술은 언제나 사람 속에 있었다.
학교 근처 허름한 술집,
테이블 위에 올려진 값싼 안주,
소주잔을 부딪치며 이유 없이 커지던 목소리들.
그때 우리는 술을 마신다기보다
서로를 확인하고 있었다.
오늘도 네가 여기 있다는 것,
내일은 아직 멀리 있다는 것.
취해도 괜찮았고,
넘어져도 웃을 수 있었다.
술은 우리를 연결해 주는 가장 쉬운 언어였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술자리는 조용해지기 시작했다.
자주 보던 얼굴은 드물어졌고,
연락은 “언제 한번 보자”라는 말로 끝났다.
그 말이 실제가 되기까지
우리는 너무 많은 시간을 건너와 버렸다.
나이가 들고 나서의 술은
사람보다 기억을 먼저 데려온다.
잔을 따르는 소리 하나에도
문득 떠오르는 이름이 있고,
안주를 집다 멈추는 순간마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장면이 겹쳐진다.
이제 나는 술을 마시며
그리움을 마신다.
다시 연락하기엔 늦어버린 사람,
이미 다른 삶 속으로 들어가 버린 관계,
말하지 못한 채 남겨둔 마음들.
술은 그것들을 조용히 테이블 위로 불러낸다.
아무도 묻지 않지만,
아무도 부정하지도 않는 방식으로.
술이 세진 것이 아니라
내가 약해진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이제야
약해질 수 있는 나이가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젊을 때는 강해야 했고,
버텨야 했고, 잊어야 했다.
지금은 잊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오히려 위로가 된다.
술을 마신다는 건
기억을 흐리게 하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선명하게 만드는 일이다.
취기가 오를수록
그 시절의 공기와 냄새,
웃음소리까지 또렷해진다.
그 시간들을 제대로 살아냈다는 증거처럼.
그래서 나는 술을 미워하지 않는다.
술 덕분에 나는 가끔
과거의 나와 마주 앉아
조용히 안부를 묻는다.
그래도 잘 왔다고,
그때의 선택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고
스스로에게 말해준다.
오늘도 나는 잔을 든다.
취하려는 것이 아니라,
잊지 않기 위해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잠시 뒤를 돌아보는 일.
이제 술은
사람을 마시는 일이 아니라
시간을 마시는 일이 되었다.
그리고 그 시간이
지금의 나를 조금 더
사람답게 만들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