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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영 Jul 23. 2019

스토리 중독자

나를 찾아가는 글쓰기-  나의 재능

나는 스토리에 중독되어 있다. 중독이라는 단어가 너무 센 게 아닐까 머뭇거려져 국어사전을 찾아봤다.

생체가 음식물이나 약물의 독성에 의하여 기능 장애를 일으키는 일


사전적 의미로 본다면 중독이 맞다. 여기서 약물은 스토리이다. 나는 신체적 기능 장애를 일으킬 만큼 스토리라는 약물에 취해 있다.

최근 공심재의 '나를 찾아가는 글쓰기' 과제를 위해 매주 월요일 점심시간에는 회사 근처 도서관을 찾는다. 글쓰기를 위해 읽어보라는 추천 도서는 일단 대출만 해 놓고, 다른 서가의 책을 훑어 나간다. 언젠가 읽어봐야지 생각했던 책들이 있으면 게임 오버다. 글쓰기 주제의 도서는 뒷전이요, 어느새 다른 책이 손에 들려 있다. 주말에는 집 근처 도서관을 찾는데 역시나 어느새 3~4권씩 손에 들려서 나온다. 최근에는 매일 출퇴근 하는 지하철 역사 안에 스마트 도서관이 생겨 세 군데 도서관에서 대출하고 반납하느라 정신이 없다. 


“신청하신 도서가 도착했습니다.” 

“대출 중인 도서 반납예정일 안내입니다.”


쉴 새 없이 핸드폰에 알림 메시지가 뜬다. 다 읽지 못하는 책이 태반이다. 그렇게 부지런히 책을 들고 나르며 팔운동을 하다 보면 잭팟이 터질 때가 있다. 나를 사로잡는 이야기가 책 속에서 펼쳐지면 그날은 잠을 자지 않고 읽는다. 아니 잠들 수가 없다. 다음날 다크서클이 눈을 뒤덮더라도 다음 이야기가 너무너무 궁금해 잠들 수가 없다. 그래서 어떨 때는 잭팟이 터질 것 같은 예감이 들면 저녁 시간에 읽지 않기 위해 자제하기도 한다. 


몇 년 전, 질리언 플린의 <나를 찾아줘>라는 소설책을 빌려 아무 생각 없이 일요일 저녁 펼쳤다가 다음날 새벽 5시 30분에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바로 출근하게 되면서 며칠 동안 골골거리기도 했다. 참고로 <나를 찾아줘>는 639페이지의 분량의 소설이다. 한번 빠지면 다 읽을 때까지 식음을 전폐하고 읽는다.   



이 증상은 11살쯤 부터였던 것 같다. 밖에서 친구랑 놀 줄도 모르고 학교 갔다 집에 온 이후 아무것도,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는 딸이 못마땅했던 엄마는 나랑 띠동갑인 언니 같은 막내 이모를 주말마다 집에 불렀다. 하고 싶은 일도 많았을 법한 스무 세 살의 이모는 얼마 되지 않는 용돈 벌이를 위해 한 달에 한 두 차례 기차를 타고 나를 만나러 왔다. 


처음 이모는 서점에 나를 데리고 가, 책을 한 권 고르라고 했다. 어떤 책을 골라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하는 나를 대신해 이모가 고른 책은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였다. 사실 당시에는 딱히 재미있지도 감동적이지 않았던 책인데 이모가 읽은 책에 대한 내용이나 학교생활에 관한 거로 친구에게 쓴다고 생각하고 편하게 써서 편지를 이모에게 보내라고 했다. 얼굴을 보고 말하는 것과 편지를 주고받는 건 분명 다를 거라고 했다. 몇 번 반항을 했으나 결국 공부하는 것보다 나은 것 같아 시작했다. 이모랑 서점에 가서 책을 고르고 사보니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닌 것 같고, 학교 앞 문구점에서 예쁜 편지지를 사서, 읽은 책에 대해 혹은 괴롭히는 짝꿍에 대해서 쓰고 우표를 붙여 이모에게 보냈다.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지금까지 내 인생 통틀어 미친 듯이 정말 미친 듯이 책을 읽었던 시기가 11~12살 무렵이었다. <키다리 아저씨>, <빨간 머리 앤>부터 각종 청소년 추리소설을 읽었고, 어쩌다 친구네 집에 가면 그 집 책장부터 훑으며 책 빌려올 궁리만 했다. 만화책은 싫었다. 그림이 너무 많아 이야기가 줄어드는 것 같았다. 책에 빼곡히 들어간 스토리를 원했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찾듯 활자에 중독되어 책을 읽었다. 학교가 끝나면 서둘러 집에 돌아와 책상에 읽을 책 한 권만 놓고 읽기 시작했다. 화장실 가고 싶은 것도 참고, 어두워져서 형광등 불 켜는 순간이 아쉬워 눈을 찡그리며 책을 읽었다. 읽은 책이 늘어날수록 시력은 나빠졌고 체중도 증가했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코난 도일, 아가사 크리스티 등 추리소설에 빠졌다. 참고서 사야 한다면 서슴없이 엄마의 지갑에서 파란 배춧잎이 척척 나왔고, 만 원을 받아 팔천 원 참고서를 사고 남은 돈으로 빨간 표지 문고판의 애거사 크리스티 소설을 한 권씩 샀다. 참고서 고르는데 5초 걸렸다면 추리소설 한 권 고르는데 한 시간씩 소요됐다. 대형서점 보다 작은 동네서점에서 주로 책을 샀는데, 교복 입은 여학생이 서점에 와서 한 시간씩 이 책 저 책 보는데도 단 한 번도 싫은 내색 하지 않았던 사장님을 생각하면 아직도 고맙다. 


밤 10시까지 이어지던 야간 자율학습 시간에는 반드시 30분 이상 책을 읽어야 마음이 가라앉고 집중을 할 수가 있었지만, 쓸데없는 책을 본다며 선생님께 혼난 이후로는 언어영역 문제집으로 대신했다. 언어영역 문제집에는 고전부터 현대소설까지 다양한 이야기가 짧게나마 담겨 있었고 책을 읽을 수 없던 나는 언어영역 문제집을 매달 한 권씩 풀었다. 


사람들은 왜 그렇게 책을 많이 읽느냐고 물어본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해 이야기에 빠져든다. 지루하거나 답답한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 마주하기조차 어려울 만큼 힘들 때 쉽게 도망갈 수 있는 훌륭한 통로다.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해 집 안에 틀어박혀 있을 때 혜성같이 등장했고,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책상 앞에 앉아 있어야만 했던 답답한 학교생활에서 숨통을 열어주었다. 당장 어디라도 떠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이 힘든 순간에 책을 펼쳤다. 책 속에 사람들의 삶이 궁금하고, 그들의 인생에 감동하고, 그들의 삶에 위로받고 배운다. 책이 있다면 지구상 어디를 가도 그리 외롭지는 않다. 이야기가 없는 삶은 영혼의 갈증을 불러일으키고, 책은 내 인생 최고의 베스트프렌드이자 영혼의 샘물 같은 존재다.


모든 중독이 그렇듯 부작용도 있기 마련이다. 무턱대고 읽어 스토리가 뒤죽박죽이다. 키다리 아저씨 주디의 친구가 다이애나인가 싶기도 하고(실제로는 빨간 머리 앤의 친구), 제인 에어와 로체스터가 왜 헤어졌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 성인이 되어 다시 읽기도 했다. 중학교 때는 결혼 전 엄마가 읽었던 할리퀸 로맨스를 창고에서 찾아내 읽은 후 왜곡된 이성관이 형성돼 키크고 근육질에 돈많은 나만 사랑해주는 남자가 현실에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또한, 철저히 스토리 있는 소설, 수필 등의 책만 읽어 인문 경영이나 자기계발서 등은 여전히 읽기 어렵다.


이번에 다중지능검사를 하니 언어지능, 자기성찰지능, 인간친화지능 순으로 높게 나왔다. 하워드 가드너는 인간의 지능을 선천적이고 변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환경, 경험, 교육 등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재능으로 봤다. 나의 언어지능과 자기성찰지능은 교육과 경험의 결과가 아닐까 싶다. 책을 읽고 이모에게 편지를 쓰면서 언어지능과 자기성찰지능이 자연스레 길러진 듯싶다. 만약 그때 이모가 서점을 데리고 가는 대신 쇼핑몰에 데려갔으면 내 삶은 어떻게 됐을까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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