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할수록 설렁설렁 시작해야 해
"오늘 하루만 쉴까..."
1월 1일 배배로 데이. 새해가 밝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타종소리를 들으며 미래를 다짐하고, 해돋이를 보며 소원을 빈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멍하니 응시하며 생각했다. 대체 새해를 맞이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다고 매년 이렇게 호들갑일까? 만약 외계인이 우리의 이런 모습을 보면
"이 스스로를 호모 사피엔스라 일컫는 종은 정말 특이하다. 이들은 자신이 발을 딛고 있는 행성이 중심에 있는 항성을 한 바퀴 돌 때마다, 실천하지도 않을 그다음 한 바퀴를 도는 동안의 일을 계획하곤 한다."
이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가뜩이나 하기 싫은데 하필 또 하체 하는 날이다. 하체 운동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을까? 있다면 그 사람은 틀림없이 변태일 거야. 마음 같아서는 쉬고 싶지만 새해 첫날부터 이런 핑계로 루틴을 어그러뜨린다면 나 스스로를 너무 미워하게 될 것 같다.
짐을 챙겨 들고 집 밖으로 나섰다. 오늘 운동은 유난히 더 힘들 것 같다.
2025년 한 해를 돌아보았다. 나는 한 해를 어떻게 보냈을까. 주인이 자리에 있든 없든 한결같이 널브러져 있던 침구류는 언제부터인가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다. "길어야 보름 정도 하고 금방 또 때려치우겠지. 내가 어디 가겠어?"라고 생각하며 시작한 운동은 어느새 4년 차에 이르렀다. 막연한 두려움에 계속 미루고 있었던 운전면허도 취득했다. 수기 공모전에 참가해 처음으로 입상이란 걸 해봤고, 그로부터 용기를 얻어 브런치스토리에 글도 쓰고 있다. 계획했던 컴퓨터 활용 자격증 취득... 은 필기까지만 붙었다. 계획대로 되지 않은 것도 많지만 이렇게 나열하고 보니 2025년을 마냥 허투루 보낸 건 아닌 것 같다.
하지만 무언가를 하면서도 마음 한편에는 늘 불안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 정도로는 안 돼.
너무 나태한 거 아닐까.
조금 더 폼을 끌어올려야 하지 않겠어?
마음 한구석에서 늘 이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 위기감이 하기 싫은 감정을 억눌러 주기도 했지만, 때론 나를 더욱 소진시켜 아예 계획했던 걸 다 놓아버리게 만들기도 했다.
분명 과거와 비교하면 나는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사람 대하는 게 두렵고 뭘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도 모른 채 방 안에 숨어있었지만, 언제부터인가 억지로라도 집 밖에 나갈 핑계를 만들고, 이런저런 활동에 참여하면서 무얼 좋아하고, 또 잘할 수 있는지 확인하고 있다.
하지만 늘 나를 괴롭히던 불안은 여전했다. 크든 작든 무언가를 성취해 낸 순간엔 잠시나마 불안감을 잊을 수 있었지만, 그 외의 경우에는 불안감을 달래기 위해 무언가에 몰두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런 몰입이 항상 발전적인 건 아니었다. 글쓰기나 자격증 공부에 몰입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게임이나 영상에 푹 빠지는 경우도 있었고 손 씻기 등 강박적인 행동으로 스스로를 진정시키는 경우도 많았다. (여전히 하루에 손을 30번 정도는 씻는 것 같다.) 돌이켜보면 불안은 전혀 유쾌하지 않은 감정이지만 한편으론 내가 움직이게 만드는 동력이었던 것 같다. 비록 그게 늘 이상적인 방향은 아니었지만.
어디서 이런 차이가 나타나는 걸까. 생각해 보면 글쓰기나 공부는 시작하는 것 자체가 부담스럽다. 일단 한 번 자리를 잡고 앉으면 어떻게든 하게 되지만, 무언가 내가 생각한 기준 이상으로 수행할 수 없다면 의미가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반면 게임을 하거나 영상을 보는 건 그리 대단한 결심이 필요 없다. 게임을 못하거나, 영상을 보고 그 내용을 기억하지 못해도 딱히 문제 될 게 없으니까.
지금은 내가 별생각 없이 몰입할 수 있는 일들이, 상황이 바뀌어 내가 진지하게 다뤄야만 하는 일이 된다면 어떨까. 가령 단순히 게임을 즐기는 게 아니라 게임 개발자가 되는 것을 염두에 두고 게임의 구성 요소를 분석해야 하는 상황이거나, 혹은 영상 편집자로서 창의적이고 비판적인 시각에서 영상을 봐야 하는 상황이었다면? 글쓰기나 자격증 공부와 마찬가지로 시작하기 매우 부담스럽지 않았을까?
분명 같은 무게인데 평소보다 훨씬 가볍게 느껴졌다. 단순히 느낌만 그런 게 아니었는지 수행 횟수가 10%~15% 정도 늘어났다. 무게를 올려야 한다는 신호이다. 1년에 한두 번 찾아올까 말까 한 가슴이 벅찬 순간이다. 그렇게 나오기 싫었는데 중량이 늘어나니 기분이 좋아졌다. 만약 오늘 운동을 쉬었다면 이런 기분을 느낄 수 있었을까.
힘들기만 하고 변화는 없어 늘 자신이 없었던 하체 운동날 의외의 선물을 마주하자, 내가 새해맞이에 냉소적이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일희일비하는 내 모습을 지나쳐 마음속 깊은 곳을 들여다보자, 여느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내게도 더 나은 내일을 꿈꾸고 싶어 하는 순수함이 담겨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렇게 바라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현실을 마주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두려움이 순수함을 집어삼키는 와중에 나는 어떻게 해서든 스스로를 보호하려 했다. 바로 울려 퍼지는 종소리와 떠오르는 밝은 햇살이 수많은 삶에 건넬 위로를 깎아내리는 방식으로. 늘 경계했던, 자기애의 건강하지 않은 부분을 다시 마주하자 마음이 씁쓸해졌다.
나, 그리고 내 주변 사람들의 마음까지 황폐화시킬 수 있는 그 불안감을 제대로 조절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의 내 모습에 자긍심을 갖고, 건강한 몰입을 통해 크든 작든 성취감을 차곡차곡 쌓아나가야 한다. 더 많은 무게를 밀지 못했어도 "오늘은 나온 것만으로도 나는 나 자신과의 약속을 지킨 거야 나 정말 대단해."라고 스스로에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좋은 글이 나오지 않아도 글 한편을 완성한 스스로를 대견하게 여겨야 하며, 내용이 다 기억나지 않아도 강의 하나를 끝마친 나를 칭찬해야 한다.
그리고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괴로운 일이 아닐 수도 있잖아. 오늘 그랬던 것처럼 막상 해보면 의외의 선물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라.
지금 느낀 이 감정. 올 한 해 동안 꼭 끌어안고 갈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