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멋스러운 문학관이 아니라 시골집에 교실과 책상이 있고, 마당에는 연못과 텃밭과 꽃밭이 있는 작은 정원 같은 곳이다.
오탁번 교수님은 현재 원서문학관에서 거주하고 계시니 제천을 가시는 분은 한번 들러볼 만 하다. 물론 사전 예약을 하여야 교수님을 만나 볼 수가 있겠지만...
서울에서 2시간 넘겨 달려가 보니, 7년 전에 한번 들렀을 때쥔이 없어 마당에서 구경만 하고 왔던 낯익은 곳이었다. 마당 한쪽에 차를 세우고 보니 오탁번 시인님께서 우리를 기다리느라 마당에 나와 계셨다. 서로 인사를 나누고 나서 마당 텃밭에 있는 오이를 따서 먹어보라 주시는데, 정말 싱싱하고 연하고 맛있었다. 텃밭에는 마늘과 상추, 토마토 등 올망졸망 재밌게 심어 놓았다. 그리고 보리수 열매도 따서 종이컵에 담아 주어 시골 정취에 흠씬 취하기도 하였다.
문학관 안에는 엄청 많은 책들이 진열되어 있다.
문득 나는 아파트 생활을 하면서 책을 주체하지 못해 절반은 모으고 절반은 버리는 실정인데 죄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귀한 책들을 버린다는 것이...
겨울에 눈만 내리면 <폭설>이라는 시로 이용의 세월의 미지막 밤 노래만큼이나 많이 알려진 시다.
또한 <굴비>라는 시 역시 많이 알려져 있어 두 편의 시를 읽을 때마다 웃음을 자아내게 된다
폭설 / 오탁번
삼동에도 웬만해선 눈이 내리지 않는 남도 땅끝 외진 동네에 어느 해 겨울 엄청난 폭설이 내렸다 이장이 허둥지둥 마이크를 잡았다 -주민 여러분! 삽 들고 회관 앞으로 모이쇼잉! 눈이 좆나게 내려부렸당께!
이튿날 아침 눈을 뜨니 간밤에 자가웃 폭설이 내려 비닐하우스가 몽땅 무너져 내렸다 놀란 이장이 허겁지겁 마이크를 잡았다 워메, 지랄나부렀소잉!
어제 온 눈은 좆도 아닝께 싸게싸게 나오쇼잉! 왼종일 눈을 치우느라고 깡그리 녹초가 된 주민들은 회관에 모여 삼겹살에 소주를 마셨다 그날 밤 집집마다 모과빛 장지문에는 뒷물하는 아낙네의 실루엣이 비쳤다 - 다음날 새벽 잠에서 깬 이장이 밖을 내다보다가, 앗!, 소리쳤다 우편함과 문패만 빼꼼하게 보일 뿐 온 천지가 흰눈으로 뒤덮여 있었다올 하느님이 행성만한 떡시루를 뒤엎은 듯 축사 지붕도 폭삭 무너져 내렸다
좆심 뚝심 다 좋은 이장은 윗목에 놓인 뒷물대야를 내동댕이치며 우주의 미아가 된 듯 울부짖었다 주민 여러분! 워따 귀신 곡하겠당께! 인자 우리 동네 몽땅 좆돼버렸쇼잉
굴비 / 오탁번
수수밭 김매던 아낙이 솔개그늘에서 쉬고 있었다
마침 굴비장수가 지나갔다
- 굴비 사려, 굴비! 아주머니, 굴비 사요
- 사고 싶어도 돈이 없어요
메기수염을 한 굴비장수는
뙤약볕 들녘을 휘 돌아보았다
- 그거 한 번 하면 한 마리 주겠소!
가난한 계집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품 팔러 간 사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저녁밥상에 굴비 한 마리가 올랐다
- 웬 굴비여?
계집은 수수밭 고랑에서 굴비 잡은 이야기를 했다
사내는 굴비를 맛있게 먹고 나서 말했다
- 앞으로는 절대 하지 마!
수수밭 이랑에는 수수 이삭 패지도 않았지만
소쩍새가 목이 쉬는 새벽녘까지
사내와 계집은
풍년을 기원하며 수수떡 방아를 찧었다
며칠 후 굴비장수가 마을에 나타났다
그날 저녁밥상에 굴비 한 마리가 또 올랐다
- 또 웬 굴비여?
계집이 굴비를 발라주며 말했다
- 앞으로는 안 했어요
사내는 계집을 끌어 안고 목이 메었다
개똥벌레들이 밤새도록
사랑의 등 깜빡이며 날아다니고
베짱이들도 밤이슬 마시며 노래 불렀다
올해 80세이시라는데 자그마한 체구에 술을 좋아하시고, 매우 시만큼이나 입담이 좋은 분이다.
한 달전에 11번째 시집 <비백> 을 출간하였다.
어떻게 충청도 분이 전라도 사투리로 폭설 시를 구사하였냐고 여쭤 보니, 전라도가 고향인 제자의 도움을 받은 거라 하였다.
비백 飛白/ 오탁번
콩을 심으며 논길 가는
노인의 머리 위로
백로 두어 마리
하늘 자락 시치며 날아간다
깐깐오월
모내는 날
일손 놓은 노인의 발걸음
호젓하다
시인은 충북 제천군 원서면 평동에서 태어나 고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석, 박사 과정은 문학을 전공하였고 한다. 원주고등학교 3학년 2학기를 가난으로 인하여 마치지 못하였는데, 졸업장을 받고 고대에 입학하게 되었다면서, 가난으로 인해 많은 고생을 하였다고 한다.
약 1시간 정도 강의를 들으면서 어찌나 웃었는지 모른다.
강의실 아니, 교실엔 고대에서 사용하던 아주 오랜 옛날 책상과 의자를 30개 기증받아서 그대로 사용 중이다. 좁고 불편한 나무책상이지만 튼튼하고 무겁고 옛 추억이 묻어있다.
문학기행은 <무시천문학동인> 17명이 갔는데, 청주 무심천에서 따서 시가 흐르지 않는 냇가로 무시천이라는 이름으로 2007년도에 결성된 문학동인 모임이다. 해마다 문학기행을 가고 책을 발간하는 중인데, 주로 문예진흥기금을 받아서 동인지를 발간하고 있다. 동인들은 시와 소설, 수필, 동시, 동화 등 다양한 장르를 통합하여 글을 쓰는 중견 작가들이다.
오탁번 시인님과 함께 점심 식사를 하면서 술도 한 잔 나누고 좋은 말씀을 듣고 왔다. 미처 너무 바빠서 챙기지 못하고 빈 손으로 간 것이 너무도 죄송했다. 당연히 신간 시집 한 권이라도 사들고 가서 직접 저자 사인을 받아야 하는 게 예의인데...
역시 교수님이셨기 때문에 강의를 아주 잘하신다.
미리 자료도 준비해 오셔서 유머와 재치가 넘치는 강의를 해 주셨다.
이렇게 문학기행을 하면서 만난 시인들이 김용택 시인, 송찬호 시인, 함민복 시인 등 많다.
직접 만나서 시 창작 강의를 듣고 오면 그분들 시집을 읽으면서 훨씬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
오탁번 / 1943년 충북 제천 출생. 196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동화, 196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 『겨울 강』 『1미터의 사랑』 『벙어리장갑』 『손님』 『우리 동네』 『시집보내다』 『알요강』 등. 소설집 『오탁번 소설 1. 2. 3. 4. 5. 6』. 고려대 국어교육과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