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평소 운동을 열심히 하셨고 자기 몸 관리에 철저하여 70 살에도 치아가 거의 튼실하였는데,
뜻하지 않은 '흑색종'이라는 피부암으로 발병 후 2년 만에 세상을 떠나셨다.
수술 후 2년 간 국립암센터에다니면서 관리를 받았지만 2년 안에 재발하면 힘들다는 의사의 말대로 되고 말았다.
아버지를 묻던 날, 배가 동이 배처럼 부풀어 오른 복수 때문에 관 뚜껑이 닫히지 않아서 참으로 안타까웠다.
저승꽃 그늘 / 한상림
아버지,
아버지 얼굴에 꽃그늘이 너무 짙어졌어요
제가 좀 꺾어 드릴까요
그 해 여름, 칠순 앞두고 유난히 짙어가던 아버지의 꽃그늘
우선 큰 송이 몇 개라도 꺾어드리고 싶었지만
극구 사양하시던 아버지의 야윈 얼굴 가득
검은 콩알이 여기저기 매달리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아버지가 그랬듯
아버지의 누이가 그랬듯
걷어내지 못한 그늘 드리운 채
떠날 채비 서두르시던 날
겨드랑이 속에 압정처럼 박혀있는 검은 꽃 하나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이제 너희들 잘 사는 모습 보았으니
결코 죽음은 두렵지 않으나 죽기까지의 고통이 두렵다며
급히 떠나시려는 아버지 부둥켜안고 매달려 봤지만
그날 밤 오 남매 자식들 세워놓고
점점 차오르던 복수로 동이배 띄우시던 아버지
검은 꽃 흔들며 아주 먼 길로 떠나가셨다
어느새 검은 꽃씨 하나 내 손등에도 떨어져
어둔 그늘 점점 넓혀가고 있지만
나 역시 그 꽃을 꺾을 수 없다
-----2011년도 <따뜻한 쉼표> 첫 시집에 수록
그리고 14년 만인 지난 해 선산에 조상들 묘소를 한 군데로 모시는 이장 작업으로 아버지를 새 집으로 모셔야 했다.
고향 마을이 보이는 양지바른 곳이었는데, 습기가 많아서인지조심스럽게 꺼낸 아버지 유골은 이미 새카맣게 변해 있었다. 그리고 금니 하나가 하얗게 웃고 있을 뿐, 생각보다 너무 상태가 안 좋았다.
새 집으로 다시 모시고 오던 날, 역시 비가 억수로 쏟아졌다.
새 집에는 돌아가시면 함께 누워 계실 현재 여든여섯 친정어머니 자리도 마련해 놓았다.
코인 티슈는 식당에 가면 물수건으로 사용하라고 동전만 한 크기의 압축된 종이티슈이다.
메마르고 거친 코인 티슈에 물을 부으면 크게 부풀어 올라 우리는 그걸로 손을 씻은 후 식사를 하곤 한다.
아버지 집을 파묘하면서 아버지에 대한 아픈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2년 간 일산 국립암센터로 가서 대전까지 모시고 다녔던, 그리고 아버지와 함께 오가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식사를 하였던 추억들이 내게 마지막 남겨주신 선물이다.
워낙 꼬장꼬장하고 깔끔한 외모에 늘 청바지도 다림질해서 입으셨고, 식사 후 3분 이내 양치질을 철저히 하시더니, 왜 그리 뜻하지 않은 흑색종이란 희귀 암으로 일흔한 살에 가신 건지..
지금은 대전 친정집에 가면 어머니 홀로 계셔서 아버지의 빈자리가 늘 허전하다.
친정엄마에게 나는 아픈 손가락이다,
학비도 제대로 못 대주고, 혼자 자립하여 알아서 공부하고 결혼하기까지, 엄마는 늘 오 남매 맏이였던 내게 빚을 진 것처럼 미안한 마음을 갖고 계신다.
베이버부머로 태어나 어려운 시기에 그 당시는 거의 다 그렇게 고생을 하였지만, 유난히 억척스러운 나는 문제집 살 돈이 없어서 쉬는 시간마다 친구들 문제집을 빌려서 베껴가며 고등학교 입시 준비를 하였었다. 교복도 맞춰주지 못하여 주변에서 아래위 짝짝이 교복을 입고 입학을 하다 보니, 학교 갈 때마다 움츠러들었고, 고등학교 3년 내내 대전시 원동 헌책방 골목을 누비며 남들이 낙서하고 메모해 둔 냄새나는 교과서로 공부했었다. 그런 내게 엄마는 늘 빚진 자식으로 미안해하신다.
지난해 갑자기 내게 목걸이를 주셨다. 그런데 목이 굵어진 내게 맞지 않아서 메달만 들고 왔다.
엄마가 그렇게 나에게 주고 싶어 하시니, 기념으로 간직하겠다고 메달만 들고 왔더니, 얼마 전에 다시 줄을 늘려주셨다. 그이후 목걸이를 항상 걸고 있다
어머니는 이제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사용 안 한 스텐 다라도 몇 개 주시면서 주변 정리를 하시는 거다.
아버지 임종을 지켜보면서,
"아버지, 죄송합니다. 아버지를 살려드리지 못해서요.
엄마 걱정은 마세요., 제가 잘 모셔 드릴게요."
그렇게 나는 아버지에게 약속을 해 드렸다. 그리고 지금까지 15년째 홀 어머니로 씩씩하게 살아가시는 어머니에게 최선을 다하려고 하나, 서울에서 대전까지 먼 거리를 자주 오가지 못하여 마음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