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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상림 Aug 24. 2022

오늘이 가장 젊은 날   

-한상림 칼럼

   계절은 순환하면서 사계절이 반복되듯, 인생의 시간도 사계절에 맞춰서 나이를 먹는다. 왜 나이는 ‘먹는다’고 표현할까?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마치 밤낮을 교대하는 태양과 지구의 순환에 따라 시간이라는 괴물이 인간의 그림자를 밟으면서 생명을 갉아먹는다는 생각이 든다.


  젊지 않고 늙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누구나 태어나서 성장이 멈추면 그때부터 신체의 노화가 서서히 진행되어 늙게 된다. 신체적인 노화로 인한 정신적인 노화도 피할 수 없다. 늙는다는 것은 어쩌면 세상의 이치에 순응하면서 점점 나약해지는 과정이다.


 불과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지극히 평범한 주부로 활기찬 아침을 맞으며 바쁘게 하루를 보내곤 하였다. 마치 초등학교 때 둥근 원 안에 하루 일과표를 만들어 벽에 붙여 놓고 채칵이는 시곗바늘처럼 뱅뱅 돌았던 시간이다. 그러나, 코로나 팬데믹이 시작되면서 봉사단체장 임기가 끝나게 되어 정지된 듯 머물러 있는 채로 3년째 시간을 보낸다.


  ‘시니어’라니? 한국 나이로 어느덧 65세가 되고 나서 시니어 대열에 들어섰다. 오십 대까지만 해도 남은 인생은 살맛 나는 젊은 시기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런데 막상 환갑을 넘어서는 순간부터 시간의 속도는 점점 더 빨라져 간다. 나이의 속도대로 시간이 더 빨리 간다고 한다면 현재 시속 65km로 달리는 거다. 대부분 도대체 왜 이리 하루가 빨리 가냐고들 말한다. 젊어서는 그런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었다. 하지만 하루하루 사그라져가는 거울 속의 모습을 들여다보면 늘어나는 주름살과 흰 머리카락이 신경이 쓰이곤 한다. 이런 표현을 아무리 말해봐도 우리 자식들은 전혀 실감하지 못할 거다. 그때의 필자 역시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여든여섯의 노모를 보면서 20년 후의 내 모습을 그려보곤 한다. 젊었을 때 젊은 어머니를 기억 속에서 찾아봐도 현재의 점점 사그라지는 어머니 모습만이 더 선명하다. 멀리 떨어져 살면서 몇 달 만에 찾아가 뵈면 전보다 훨씬 더 쭈그러진 얼굴과 손등과 목과 그늘진 모습이다. 그 모습이 미래의 내 모습이라고 반추해 보면서 거스를 수 없는 인생의 시간 앞에서 어떻게 하면 남은 시간을 좀 더 알차게 보낼 수 있을까 하고 고민하게 된다.


  친정어머니는  혼자 사시면서 혼자 종합병원에 다니고 정기적으로 씩씩하게 카톡으로 자식들과 소통하고 있다. 그런 노모가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모른다. 한 번은 이른 아침 남편 출근 시간에 맞춰 엘리베이터를 같이 타고 길을 나섰다. 무거운 짐을 둘이서 들고 움직이는데, “카톡, 카톡, 카톡” 열 번 이상 불과 몇십 초 사이에 신경이 쓰이게 울리는 휴대폰 소리에 한마디 던졌다. “도대체 누구한테서 그렇게 이른 아침부터 카톡이 연달아 오는 거예요?” 대부분 카톡 단톡방은 무음으로 설정하는데, 그렇게 많이 울리는 카톡은 개인이 보내는 거라고 내 방식대로 판단이 선 거다. “이 시간에 울리는 것은 장모님 카톡이야.”라고 남편은 대답하였다.


  친정 노모가 아침마다 자식들 부부 10명이 함께 있는 단톡방에다 이것저것 수많은 것들을 보통 열 개 이상 퍼 나르곤 한다. 어느 땐 정치적인 성향이 다르다 보니 형제들 간에도 시비가 일어나고 쓸데없는 것들을 퍼 나른다고 핀잔하여 서운해하면서 며칠간 카톡을 단절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냥 노모가 하시는 대로 알아서 보고 싶은 글만 보기로 하고 잔소리 말자고 결론을 내리게 된 것이다. 즉, 노모가 날마다 보내는 카톡 문자는 오늘도 무사하시다는 증거이기 때문에 오히려 문자가 뜸하던가 아예 없으면 비상사태가 벌어진다. 굳이 장모 문자를 왜 소리를 켜서 시끄럽게 하냐고 묻는 말에 남편은 시어머니 즉 남편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일부러 소리를 켜 놓았다는 것이다. 평소 장모에게는 전혀 무심하다고 서운해하였는데 오히려 속 깊은 그의 마음을 읽었다.


  이제는 내 아이들이 내가 부모를 바라보면서 걱정하고 노심초사 염려하던 부모의 모습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마음은 청춘인데, 사진 속의 모습을 보면 영락없는 노인이다. 그래서 곧 지공생(지하철공짜)도 될 것이고, 영화관에 가서 5천 원으로 표를 살 수도 있다는 말을 들으면서 기쁘기보다 오히려 이젠 피할 수 없는 65세 이상 시니어 대열에 들어서는 것이 두렵다. 이렇게 늙어가면서 느끼는 감정은 아마도 우리 부모들도 마찬가지였을 거다. 미처 걸어보지 못한 길에서는 느낄 수 없는 감정을 걸어보고 나서 앞서간 사람들의 심정이 읽힌다.


  그래서일까? 요즘은 한 시간 한 시간이 너무도 귀하고 아까워서 잠시도 헛되이 보내기 싫다. 사람들과 만나는 시간을 줄이고 집에서 혼자 책을 보거나 글을 쓰면서 보내곤 한다. 물론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거리두기가 많은 관계를 단절시킨 후 삶의 패턴도 바뀌게 된 것이다. 하지만 노안으로 인해 책을 오래 앉아 읽기도 힘들고, 오래 앉아 있으면 허리가 아파서 드러누웠다 앉았다를 반복하면서 젊었을 때보다 절반도 못 읽고 책장을 덮어야 한다. 이런 상태를 아이들에게 말해 주면서 눈 좋고 건강할 때 책도 많이 보고 하고 싶은 것 하라고 권해보지만 아무리 말을 해도 아이들은 말은 알아듣지만 절실한 내 심정을 이해하진 못할 것이다.


  시니어가 가져야 할 것 중에서 제1순위는 건강이고, 다음은 돈이라고 한다. 건강해야 돈도 쓰고, 돈이 있어야 여러 가지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세상이다. 베이비 부머 시대에 태어난 우리 세대는 대부분 죽어라 일하고 벌어서 자식들 뒷바라지에 헌신하고 노후대책을 제대로 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막상 아이들을 가르치고 나니, 생각지 못한 문제점들로 아이들은 우리보다 더 힘든 세상을 살아가게 될까 두렵다. 그저 지하 단칸방에서 시작한 신혼살림에서도 행복해하며 아이 낳고 집 장만의 꿈을 키우며 소소한 만족을 하며 살았던 그때가 엊그제인데, 세상이 급속도로 발전하여서 우리 세대보다 훨씬 풍요롭고 윤택한 삶을 살면서도 살기 힘들다고 결혼을 피하고 결혼을 하여도 자녀 출산을 포기하고 있다.


  우리가 결혼하여 부모 곁에서 나올 때만 해도 부모는 전혀 집 마련 걱정을 하지 않았었다. 결혼하여 분가하면 알아서 살아가며 집 장만을 하고 아이를 낳고 살았었다. 그러나 요즘 세대는 우리와는 전혀 다른 사고방식으로 극히 현실적인 이상을 추구하고 있다. 거기에 따라 부모가 또한 이래라저래라 말을 꺼내지도 못한다. 즉, 자식 눈치를 보면서 지들 인생이니 알아서 살라고 지켜보기만 하여야 한다.


  아무리 백세시대라고 하지만, 건강하지 못하고 돈 없고 쓸쓸한 노후에 오래도록 살면 뭣하나? 앞으로는 의학의 발달로 인해 재수 없으면 이백 살까지 살게 된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그렇다. 인간의 수명이 아무리 길어도 건강하게 백세를 살면 몰라도 건강하지 않은 상태로 짐이 된다면 오히려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힘들 수도 있다. ‘긴 병에 효자 없다.’고, 너무 오래 앓아누워 있으면 자식들에게도 짐이 된다. 요즘이야 요양원이나 요양병원에 보내지만, 막상 그곳에서도 병원비로 인해 자식들에게 짐이 되는 것조차 눈치 보이는 것이 싫다.


 노후대책으로 보험 가입을 많이 하였지만, 이제는 매달 내는 보험료가 부담된다. 다행스러운 것은 아직도 남편이 힘든 모습으로 매월 돈을 벌어다 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매일 여기저기 아프고, 기억력도 떨어지고 예전과 다르다고 하소연하는 남편을 보면 평생을 일만 하는 늙은 경주마 한 마리를 보는 듯하다. 이래저래 노년기에는 여러 가지로 마음 편치 않은 시기이다.


  요즘 15년 이상 함께 해 온 문학단체 동인들과 함께하면서 노후에도 죽을 때까지 함께 하자고 말하곤 한다. 한참 왕성한 의욕으로 문단 생활을 시작하던 중년기에 만난 사람들이다. 인사동으로 대학로로 매달 모임을 하고 문학기행도 다니고, 작품 합평을 나누면서 매년 동인지를 발간해 오면서 정이 들었다. 그러나, 지금 이 나이에 새로운 단체로 들어가서 다시 15년 이상 새로운 사람들과 익숙해질 만한 시간이 기다려주지 않기 때문에 현재까지 함께 해 온 사람들의 소중함이 더 귀하다.


 다음 달에는 1박 2일로 문학기행을 준비하고 있다. 거의 60대 중반에서 70대 중반인 사람들이다. 모두가 노인네들인 셈이다. 3년째 코로나로 인해 문학기행을 가지 못하고 매달 만나던 모임도 못 갖다 보니 겨우 줌으로 여러 번 접속하여 소식을 주고받았다. 그런데 줌을 사용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아예 그마저도 따라오지 못한다. 노화가 오면서 시대의 흐름에서도 점점 뒤처진다. 따라서 새로운 문명과 기기를 다루는 것에 두려워하지 않고 항상 새로운 것에 도전해야 한다.


  문학기행 가는 것을 망설이는 사람들에게 그리 말을 하였다. “오늘이 가장 젊은 날!, 가자고 할 때 얼른 나서야 합니다. 아프면 꼼짝 못 하고, 좀 더 있으면 오라는 데도 없고, 갈 곳도 없습니다.” 이 말을 들은 동인들이 깔깔거리며 웃었다.


 점점 마음이 조급 해지지만, 시니어라는 대열에서도 한눈팔 겨를 없이 무언가를 찾고 무언가 하고 싶은 거 늦기 전에 해야지 하는 열망이 강하게 남아있다는 것이 천만다행이다. 그렇다. 아직은 그래도 남은 무언가를 할 만한 거들이 무궁무진하다. 어쩌면 젊은이들보다 더 강한 열망으로 최선을 다하여 열심히 노력할 수 있는 시니어만의 능력이 있다.


그 능력이야말로 아직 인생이라는 숲길을 걸어보지 못한 사람은 절대로 깨닫지 못하는 값진 경험이다.


경험이라는 시계의 크고 작은 두 개의 톱니바퀴가 서로 맞물리며 돌아가듯, 남은 시간도 신체와 정신이 고장 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여 오래도록 꺼지지 않는 불꽃을 피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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