꾼
한상림
내는 말이여, 열여섯 살부터 육십 년 동안 저 논배미에서 엎드려 살았구먼
평생 논물에 발가락이 불어 터지도록 문장을 써 내려갔다고 봐야제
아마 내가 쓴 발바닥 문장은 아무도 못 알아볼껴
그렇다고 외국말로 새끼 꼬면서 쓴 것도 아니고, 한자로 쓴 것도 아닌디 말여
자식 같은 낟알을 정성 들여 키우면서 쓴 이야기가
못해도 대하소설 몇 마지기는 될겨
워디, 낟알 같은 새끼들이라고 내 맘대로 자라주던가,
갈라진 논바닥 타들어 갈 때 내 속에서 불길이 솟더라니께
비바람이 지랄 떨고 가봐, 마구 뒤집어 놓은 내 새끼들
살살 어르고 달래 주면서, 지발 낟알마다 알차게 곳간 좀 채워달라고
빌고 또 빌었잖여
다행히 아적까진 고만고만한 날씨여서 다행여
올가을 이대로만 가면 월매나 좋을겨,
어떤 입심 좋은 사람이 말하길,
세상에는 3무가 있다는디 고거시 말여,
공짜, 비밀, 정답이라네
맞아, 공짜가 어딨어, 뒈지게 몸 바스러질 때까지 일하면 하늘도 알잖여
세상에 비밀도 없어,
제아무리 감추고 삼켜봐도, 고까짓 비밀은 핫바지 방귀처럼 슬금슬금 새지
정답? 수학 공식 말고는 살아가는 방식엔 그 어떤 정답은 없다니께
하늘에 땅에 그저 순종하면서 착하게 살믄 그게 정답이라 생각혀
땅바닥에다 성실하게 거짓없이 써가는 이야기가 꾼이지
제 아무리 잘났다 해도 하늘이 도와주지 않으면 말짱 도루묵여
햇살과 비와 바람이 잘 어우러져야 낟알도 잘 영그는겨
요새는 왜 그리 꾼들이 많은겨, 꾼도 꾼 나름여
보이스피싱이니 뭐니 하는 새로운 사기꾼들이 자꾸만 발전하는디
그놈들 깡그리 잡아다 땅바닥에다 한 십 년 만 처박아 놓고
벼농사만 지어보라고 하면 될겨
고놈들은 그저 입으로만 사기쳐서 먹고 사는디
내는 손과 발로 논바닥에다 가끔은 사기를 쳐보곤 했지
어여 잘 자라라, 잘 자라면 느그들 천국으로 보내줄게
그래서 누가 내게 직업이 뭐냐고 물어보면
그저 농사꾼이라 대답한당게
세상에, 농사꾼처럼 재밌는 천직이 또 어딨을 겨
그래서 나는 꾼 중에서 가장 미련한 농사꾼이 참말로 자랑스럽당께.
그려, 안 그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