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시랑 나랑

늙은 아버지

- 자작시

by 한상림

늙은 아버지

한상림



1

고향집 늙은 모과나무 한 그루, 노란 알들을 품었다 횟배 앓던 아이가 장독대에 숨어 한 입 베어 물고 꼭꼭 씹어 먹다 울컥 삼키던 떫은 목구멍에서 하얀 회충을 토해 냈었다 핼쑥한 아이가 자라 집 떠나던 날, 보퉁이에 넣어 주던 해부터 드문드문 해 걸이를 하더니, 오 년 만에 못난이 알들을 매달고 쓰러져가는 집에 불 밝혀 놓았다 배고픈 아이들은 어느새 중늙은이가 되었다


2

중년의 아버지가 다시 알 따러 돌아와 높은 나뭇가지를 붙들고 장대질을 해댄다 생채기 알들이 하나둘씩 장독대로 떨어져 뒹굴고, 늙은 아버지들이 모여 살던 비탈 산길에서 헌 가지는 스스로 잘라내고 새 가지를 만들며 넓혀가던 허공, 오래 묵은 가지를 부러트리며 새 길을 낸 그 허공에서 큭큭 마른기침 소리 들려온다 흰 두루마기를 입은 아버지들의 웃음소리가 폐가의 녹슨 양철 대문을 밀고 들어온다 아버지의 아버지 그 아버지의 아버지, 그 아버지의 아버지들이 헛기침하며 마당을 한 바퀴 휘돌아서 모과나무 아래 모이셨다.




남편이 태어나 자란 고향집에는 200년 넘은 모과나무 한 그루가 아직도 폐가를 홀로 지키고 있다.

해마다 이 맘 때면 짙노란 모과 열매로 불 밝혀 놓고 옛이야기부터 현재까지 이야기를 홀로 받아적고 있다.

늦가을 긴 장대를 들고 가서 모과를 따던 남편의 모습을 보고 시상이 떠 올라서 2006년도에 써서 2011년도 첫 시집 <따뜻한 쉼표>에 실린 시이다.

아직도 폐가를 홀로 지키는 모과나무 때문에, 가끔 기울어진 폐가 뒷마당을 돌아보곤 한다.

조상 대대로 물려받아서 육 남매를 기르신 어머니,

구순의 어머니가 이제 폐가처럼 기울어져 요양병원에서 뇌사상태로 계신다.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없는 폐가처럼, 폐선이 되신 어머니.

시집와 평생 500번은 더 제사를 지내고 조상을 지극정성으로 모셨다고 하시면서

한 번도 차례나 제사를 거른 적 없는데,

이번 추석은 처음으로 차례를 생략하여 추석날인 이 아침이 씁쓸하다.

나 역시도 결혼한 지 39년 만에 올해 처음으로 시댁인 대전에 가지 않아서 허전한 아침에 어머님을 생각하며 시 한 편 골라서 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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