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여름은 유난히 긴 장마와 함께 늦더위가 기승을 부렸다. 여름을 제대로 만끽해보지 못하고 성급하게 가을을 맞게 되었다. 곧 기온이 뚝 떨어지게 되면 나무와 풀들은 단풍이 들고 오색찬란한 가을의 대향연이 시작된다. 가을은 감쪽같이 왔다가 슬그머니 꽁지를 감추는 짧은 아쉬움을 남기지만 우리 인생의 가을도 마찬가지다.
어느 날 아이 낳아 기르며 앞만 보며 달리다가 거울 속의 내 모습이 낯설어 보일 때가 있다. 나도 모르게 머리카락 속에서 습관처럼 새치를 뽑아내게 되었다. 그러다 지금은 수없이 늘어나는 새치들을 바라보면서 벌써 가을을 맞이하였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때마다 자꾸만 뒤를 돌아다보며 멈칫거리게 된다.
시월은 인생에 있어서 가장 멋스럽고 중후하게 붉어지기 시작하는 중년이다. 선선한 바람이 소매 끝으로 파고들면 찬 기온에 예민해지는 체온처럼, 내 인생의 체온도 갑자기 붉게 물들어 있는 걸 느낀다. 하지만 이런 민감한 반응이야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계절 중에 가을은 오색찬란함으로 각기 제 색깔을 표현하지만, 내 인생의 가을은 과연 무슨 색깔로 표현할 수 있을까.
붉은 당당함
한상림
덕소 방면 한강 가에 나염 원피스를 입고
오래된 여자처럼 서 있는 아파트들
그 앞으로 느릿느릿 지느러미 치며 걸어가는 자동차 행렬
저녁 물길 저어대는 저어새 한 마리
둑길에서 속살거리는 갈대꽃들
중천 푸른 귀때기 한 줄 부욱, 찢어 물고 가는 제트기
하늘과 강물은 스스로 흔적들을 지우고 있다
맞은편 강가, 그 숲길에 한나절이 지난 여자와 남자가 있다
쑥부쟁이를 핥고 있는 꿀벌을 바라보며
강물이 들려주는 잠잠한 일상을 들으며
무릎베개를 하고 누워
강물 같이 어디론가 흘러가는 하늘 길을 바라보는 여자
그 여자의 긴 머리카락 속에서 새치를 뽑고 있는 한 남자
수줍어하다 어느새 부끄러운 줄 모르고
전설같이 걸어온 삶 슬몃슬몃 들춰내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당당해지고 싶은,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앞서 간 소리에 금세 붉어지고 마는 시월
-“붉은 당당함” <한상림 / 시집 ‘따뜻한 쉼표’ 전문 2011년도>
가을이면 나는 미사동 강가를 찾아가 산책을 한다. 한강의 물결이 잔잔하게 일렁이는 어느 오후였던가. 그날도 덕소 방향으로 서 있는 낡은 아파트 그림자가 물속에 잠겨있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우연하게 지금의 내 모습처럼 오래된 중년의 여자가 연상되었다. 둑길을 걸으면서 쑥부쟁이를 핥고 있는 꿀벌들을 바라보면서 중년의 그 에로틱한 사랑이 느껴졌다.
뭐랄까? 느낌? 공감? 아니, 차라리 전율에 가까운 충격(?)이었다. 강물 속에 담긴 하늘의 구름을 들여다보면 맑고 높은 하늘이 내려와 있어 강물과 한 몸으로 섞여 들고 있었다. 어쩌면 서로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있는 모습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푸른 스크린 속에는 어느새 내가 중년 배우가 되어 지나간 삶들이 그 안에서 재생되고 있었다. 그 스크린 속에 담긴 내 삶의 빛깔도 붉게 물들어가는 시월처럼 오색찬란한 빛들 속에서 붉은빛이 강하게 보였다.
붉어진다는 것은 어쩌면 당당해지기 위하여 순응하는 스스로의 빛인지도 모른다. 그동안 살면서 가장 소중한 첫아들도 잃어 보았고, 그 지워지지 않는 아픔의 흔적을 감추려 자주 눈시울 붉힌 적도 많았다. 그러나, 지금 오십 중반의 나이에 세상일에 두려움 없이 매사 주어지는 일들에 최선을 다하면서 살고 있다. 십삼 년 동안 봉사단체 몸을 담고 일하면서 틈틈이 글을 쓰고 거기에서 또 다른 한강의 붉은 전율과 행복함을 느낀다.
이제 신을 제외한 그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때론 “死의 찬미”를 읊으며 언제 마감할지 모르는 죽음조차도 당당하게 받아들이고 싶다. 할 수만 있다면 남은 생도 저 강물처럼 묵묵히 모든 것을 포용하며 자연에 순응하며 흐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