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시랑 나랑

오랜 풍경 하나

-캄보디아 톤레샵 호수

by 한상림

오랜 풍경 하나

한상림



우기가 되면 바다 호수는 희뿌연 몸을 살찌운다

쏟아내는 햇살과 소나기에 적당히 버무려진

만삭의 배를 출렁댈 때면

하늘은 바다 호수를 위해 스스로 낮아지고 있었던가,

하늘 가까이 배를 띄우고 살아가는

순하디 순한 총처럼 쏘아대는 평화로운 눈빛을 가진

구릿빛 깡마른 사람들에게

아무 생각 없이 손 흔드는 사이

낡은 배 한 척이 바짝 다가왔다

원피스를 입은 여자 아이가

인형극 속의 검은 인형처럼 배 위로 톡 튀어 올라

창문을 두드리며 몽키바나나 한 송이를 내민다

“기브 미 완 달라, 완달라”

저만치 구멍 난 배 위에서 아이를 기다리는 아빠가

찌그러진 양푼으로 물을 퍼내며

검지 하나를 편 딸아이를 올려다본다

그 옆에는 커다란 물뱀이 맥없이 널브러져 있고

물 뱀 옆에 앉아있는 작은 딸아이에게

과자봉지 두 개를 건네주자

양손으로 움켜쥐고는 진저리 치며 웃는다

그러다 만지작거리던 과자봉지를 아빠에게 내민다

노를 저어대던 아빠가 까맣게 그을린 팔을 길게 뻗었다

아빠를 먼저 챙기려는 아이를 무심코 바라보는데

한 손으론 노를 젓고 다른 한 손으론 과자봉지를 물어뜯어

딸아이의 입에 밀어 넣는다

열차에서 계란 껍데기를 벗겨 하얀 속살을 내게 먼저 한 입 물려주시던

내 아버지도 그랬었다 내 아버지의 아버지도 그랬을 것이다

어디선가 낯익은 오래된 풍경처럼

나는 배에서 멀어지기 시작하였고, 그 순간까지

아빠도 딸아이들도 물뱀도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단지 푸른 하늘만이 호수의 물살을 따라 출렁출렁

수평을 맞춰가려 기울어지고 있었을 뿐




바나나 소녀 배 안에 있는 바나나 소녀 동생


2010년 10월 3일

캄보디아 씨엠립에서 톤레샵 호수로 갔다.

톤레샵 호수는 동남아에서 가장 큰 호수이다.

파도가 잔잔하여 바다처럼 큰 호수라서 바다 호수라고도 부른다.

007 영화 촬영지로 유명한 항루원으로 가기 위해 배에 올라탔다.

그리고 배가 출발하자마자 한참 수다를 떨고 있을 때,

갑자기 나룻배 하나가 우리 배에 바짝 다가오더니 인형처럼 자그마한 이 체구의 소녀가

곡예를 하듯 우리 배에 올라타 창문에 기대어서 몽키바나나 한 송이를 내놓는다.

그리고서 2달러를 달라고 하였다. 너무 볼품없어 보이는 바나나 한 송이,

우리는 비싸다고 하면서 안 산다고 하였다.

비싸서라기보다 갑자기 앵벌이처럼 아래에서 배를 타고 기다리는 아빠의 모습을 보고 짜증이 났다.

아이는 굶주려서인지 키와 몸집이 너무 작았다.

그리고 앞니가 새카맣게 벌레를 먹은 걸 보니 아직 유치를 가진 5-6세의 소녀였다.

결국 1달러를 주겠다고 하니까 그러라고 하여서 바나나를 받기 전에 1달러를 소녀에게

먼저 주었다.

이런, 황당한 일이?

소녀는 1달러를 더 달라면서 바나나를 주지 않았다. 영악스럽기 그지없다.

2달러를 결국 손에 쥐겠다는 뜻인데,

우리는 그럼 그냥 이 바나나를 그대로 가져가라고 하였다.

소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얼른 바나나를 손에 쥐고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는 아빠가 탄 배로 툭 내려 뛴다.

물속에서 빠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배에는 동생인 작은 아이가 있었다.

가난으로 인하여 아이의 삶을 노동력으로 이용하여야만 하는 부모로서 조금이라도 미안하다는 생각이나 했을까?

나는 핸드백에 있는 사탕이랑 과자를 모두 꺼내 주었다.

그리고 앞니가 썩었는데 양치질 잘하라고 손짓으로 말해 주었지만,

아이가 알아 들었으려나?

새카맣고 원숭이처럼 자그마한 그 소녀의 눈빛과 편 손가락 두 개로 투 달라라고 외치던 가냘픈 모습이 여전히 아른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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