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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상림 Mar 19. 2022

어머니와 비밀번호

-자작시

2022년 3월호 월간 모던포엠에 실림


어머니와 비밀번호


   한상림


어머니가 비밀 문을 열어주던 날

비밀은 지키는 것이 아니라 기억하는 거라고

해마다 생일이면 백설기 시루를 장독대에 올려놓고

천지신명에게 빌었다

육 남매 뒷바라지에 등허리 굽은 어머니에게

비밀번호는 자식들이고, 나에게는 그냥 어머니다

응급실로 실려 가시던 날 마지막까지

양손에 비밀번호를 꼭 쥐고 놓지 않으셨던 어머니,

가끔 비밀번호조차 기억나지 않을 때

나는 자주 다니던 길도 되돌아온다

길들인 습관처럼 자동으로 숫자를 누르면

비밀번호가 틀렸다고 뜨는 경고창,

세상이 복잡한 건지 내가 복잡해진 건지

비밀번호를 덕지덕지 달고 살면서

어디 숨겨둘 만한 비밀창고 하나 없다

머릿속 어딘가에 깊이 저장해 놓고 몰래 꺼내 봐도

점점 흐려지고 멀어지는 내 기억력을

나조차 믿을 수 없다

저 세상에 가신 어머니 또 비밀번호를 바꾸셨는지

가끔 기억을 클릭해도

어머니는 열리지 않는다.



지난  2월 22일

7개월 12일 동안 뇌사상태로 요양병원에 계신 시어머님께서 소천하셨다.

이 시는 지난해 7월 10일에 뇌경색으로 쓰러져 의식을 잃은 후 수술도 못 해보고 뇌사가 되신 어머님을 생각하면서 쓴 시다.


마침 모던포엠에서 청탁이 와서 보낸 시 2 편 중 1편이다.


오미크론으로 하여 례식을 간소하게 하였지만 그래도 축복받은 마지막 길을 만들어 드려서 위안이 된다.


집안의  큰 어른이시고 큰 나무인 어머님과 이별은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이었지만 그동안 누구보다 훌륭한 삶을 살아오신 어머님 가시는 길도 평화로웠기에 편안히 보내 드리고 하늘에 감사하는 마음이다.


자랑이 니라, 1982년도에 남편과  약혼식을 한 후  40년 동안  시어머니와 단 한 번도  눈살 찌푸리는 일 없이 정말 자랑스러운 고부관계였다.


어머님의 삶은 대하소설 속 주인공과 같은 삶이었다.

누구보다 존경하는 어머님이었고, 지막까지 아낌없이 모두 자식들에게 탈탈 털어주시고 가신 뒷모습은 평소에 사시던 어머니의 참모습이다.


그동안 인생을 헛되지 않게 살았다고 할 만큼 많은 분들이 슬픔을 위로해 주었다. 현직도 아니고 전직인 나에게 국회의원  두 분. 구청장. 구의장. 민주평통에서 조기를 보내 주었고, 문학단체  여러 곳에서 조화를 보내 주었다.


어머님 가시는  모습이 결코 쓸쓸한 모습이 아닐 수 있도록  변에서 위로해 주고 베풀어 주었음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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