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시집 온 마을은 전쟁터
1. 커져버린 목소리
비조차도 숨을 죽이고 안개처럼 내려앉는 아침이었다. 갯벌에서 건져 올린 포탄껍질을 담처럼 쌓아 놓은 매향리 역사관에는 고철 덩어리를 짙은 갈색으로 녹슬어 버리게 할 만큼 기나긴 세월이 침묵으로 흐르고 있었다. 성큼성큼 발걸음 소리가 들리는 듯 하더니, 깔깔깔 웃음소리가 적막을 순식간에 깨버렸다. 참, 환하게 웃는 여인들이었다.
“우리들 목소리가 참 크죠? 친정에 가도 그래요. 너는 목소리가 왜 그렇게 크냐고, 귀 아프다고. 그래서 내가 우리 동네 한번 살아보라고 그랬어. (웃음) 여기 동네 사람들 목소리가 유난히 커요. 서로 소리치면서 말하는 게 습관이 되어 버렸는지. 아직도 안 고쳐지네”
이 마을에 하루 종일 울려 퍼지던 폭격기 소리가 멈춘 지 13년. 그 보다 더 오랜 시간 동안 들어왔던 소음에 어느 새 맞추어져 버린 목소리였다. 대체 그 소리가 얼마나 크길래 그랬냐는, 그 소리가 들릴 때면 귀를 막으면서 참고 견디셨냐는, 참 한심한 질문을 던질 수 밖에 없었다.
“절대 익숙해지지 않아요. 그 소리에? 말도 안 되지. 귀를 막는 걸로요?.... 아이들이 뛰어 놀다가도 폭격기가 지나가면 (가슴을 꼭 감싸 안으며) 이렇게 하고 있어야 겨우 견디지. 그러니까 이게 얼마나 잔인하고 소름 끼치는 소리야. 심장이 갈갈이 찢어지는 소리. 왜 찌익~ 하고 순간적으로 나는 소리도 소름이 짝 끼치죠? 그거의 몇 백배? 아니 몇 백배라고 말할 수도 없지. 아주 그냥 정말 처참한 소리에요”
“몸서리가 쳐지죠, 그 고막을 찢는 소리… 그건 몸으로 느끼는 거에요, 이 피부로 직접. ”
13년 전 기억이다. 쿠니 사격장이 폐쇄된 2005년 이후로는 사라진 소리다. 하지만 지금도 그 소리를 떠올리면 자기도 모르게 가슴을 끌어안고 몸을 떤다. 움찔. 그 기억에 대한 질문은 13년이 지난 지금도 어깨가 긴장되어 올라가고 입술을 일그러지게 만드는 자극이다. 굳이 약속하지 않았지만, 세 사람의 얼굴에서 생글생글 떠돌던 웃음기가 사라졌다. 고통의 얼굴이다.
2. 매향리에서 기다리고 있던 것들
“10월에 중매로 만나서 바로 (다음 해) 1월에 결혼했으니까. 시간이 되게 짧았죠. 어른들이 밀어붙이는 식으로, 그 시대는 다들 옛날 식으로 결혼을 했으니까. 아저씨들이 함을 가지고 왔는데 낙지가 있다고 막 그래서… 여기가 바닷가마을이라는 것도 그때야 알았어요. 결혼하기 일주일 전에 함 들어온 날, 그때 알았어요.”
“서울에서 21살에 신랑을 만났어요. 그래서 22살 1월 1일에 처음 이 마을에 와 보고는 그 해에 아들을 낳았죠.”
‘매향리’라는 마을 이름만 알고 시집을 왔다. 아마 매화꽃 향기라는 뜻이겠거니, 참 예쁜 이름이구나, 그럼 매화나무가 많은 마을 이려나 생각을 했단다. 아직도 대면 대면한 신랑의 뒤를 따라 들어선 마을 어귀부터 아늑하니 참 예쁜 마을이었다. 신혼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잠들 때만 해도 그저 설레는 기분이었다. 다음 날 아침이 되기 전까지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지 못했다. 분명 전쟁은 끝났는데, 아직도 매향리에는 매일매일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사격장에 빨간 깃발이 올려지면 그때부터 마을 하늘 위에는 폭격기가 날아다니며 바다 위 농섬을 향해 포탄을 쏘아댔다.
“충격이었죠. 폭격기가 막 지나가는데, 놀라서 뛰어 들어가서 대체 저게 뭐냐고 하니까. 그때서야 저기에 사격장이 있다고 (말을 하더라고). 그때야 알게 된 거야.”
“포탄이 이렇게 쌰~아 하고 가면 온 몸에 소름이 짝… 저 비행기가 여기로 떨어지면 어쩌나, 포탄이 떨어지면 어쩌나 이런 생각이 절로 들죠”
그 소리가 잠시 중단되는 날도 알게 되었다. 미국의 국경일이면 폭격기가 날지 않았다. 7월 4일 독립기념일. 부활절. 크리스마스... 한국의 작은 시골 마을에 사는 50대 아낙들이 지구 반대편 미국의 국경일을 줄줄이 꿰고 있다. 그 날이면 폭격기가 날지 않는 날. 끔찍한 소음에서 해방되는 날. 미군 조종사에게는 간만의 휴일이었고, 매향리 마을 사람들에게는 잠시 고문을 쉬는 날이었다.
“토요일 일요일 그런 건 잘 지켜요. 미군이니까. 마을 구경하라고 처음 왔을 때가 1월 1일, 그때가 신정 때라 폭격소리를 못 들었어요, 그런 명절에는 안 하니까.”
“1월 1일, 크리스마스 이런 때는 안하고, 그러니까 외지에서 주말에 잠깐 놀러 온 사람은 모르는 거야.”
“시집올 때 주소까지 알고 오는 건 아니잖아요. 여기가 뭐 시골이다, 어촌이다, 목장을 하나 보다 이렇게 알았지. 알았다면 안 왔죠. 여기가 이런 전쟁터일 꺼라고는… 여기 남자들이 다 인지를 했나 봐. 폭격장이 있다고 하면 시집을 안 올까 봐 안 알려 줬나 그런 생각이 들죠. 임신은 해서 배는 불러 있는데 폭격기가 날라와서 우르륵~ 하는 소리가 나면 또 폭격… 그 소리도 엄청나거든. 물고기가 방구 끼는 소리처럼. 이게 뭐냐고! 뭐라고 말할 수도 없고, 대체 여기를 왜 시집을 왔나, 뭐 이런 동네가 있나, 후회하지. 속았으니까 왔지. 중요한 이야기인데 안 한 거니까 잘못 한 거지, 생존이 달린 문제인데 안 한 거니까 상당히 잘 못 한 거고.”
3. 폭격 속에서 자라난 아이들
세 명의 자식을 낳아서 키울 만큼 긴 세월 같이 산 남편이지만, 원망은 남았다. 이제야 웃으면서 이야기하지만, 알았다면 절대 안 왔을 길이다. 평생 같이 할 여인에게 말 못할 비밀을 하나 눙치고 있어야 했던 그 사내들 마음 속 불안함도 헤아릴 길이 없다. 폭격기 소리에 움찔거리고 포탄 소리에 놀라면서도 삼시세끼 차리다 보면 하루가 지나가고 아이들이 태어나고 노인들은 떠나갔다.
“새댁이니까 애기도 갖고 밖에 나가지도 못하고 너무 힘들면 친정에 가서 있고. 아기를 낳고 기르기가 너무 힘든 거야. 다들 아실 꺼야. 날마다 이혼하자고 그랬어. 나가서 살 거 아니면 이혼하자고 그랬어. 말을 안 한 것도 거짓말이라고 막 따졌어요. 그러면 입을 꾹 다물고 들어줘요. 말을 안 한 죄로 그 소리를 다 들어주는 거지”
“아이들에게 많이 미안했죠. 얘기들 키울 때 태교 때부터 적응이 된 건지 경기도 잘 안 해요. 애들 잘 때면 배 위에다 베개를 올려놔요. 이렇게 눌러주면 애가 경기를 안 하니까."
뱃속에서 내내 들어서 익숙한지 별로 놀라지도 않더라는 말이 더 참담했다. 이 마을의 출산 준비물은 예쁜 배냇저고리도 아니고 산책 나갈 유모차도 아니고 아이 귀를 막아 줄 솜이었다. 밖에서 노는 건 엄두도 못 내는 동네에서 꾸역꾸역 아이들은 자라났다. 그래도 나가서 놀고 싶어하는 아이들이 담 밖을 나서면 어디선가 날아올 지도 모를 유탄에 조마조마한 것도 일상이었다. 사람보다 더 예민한 청각을 가진 소들을 키우는 것도 난리가 아니었다.
“소들도 유산이 되고, 소가 모자라서 사오잖아요? 그럼 그 소가 적응을 못하는 거야. 시끄러워서. 소리가 나면 여기에서 저기로 막 뛰고 서로 밝히다가 꼬랑지도 밟고 젖가슴 치받고 하면 피도 나고, 유량도 떨어지고 그래요. 유방염도 걸리고, 스트레스 때문에”
“처음부터 난 소는 괜찮은데, 들여온 소는 적응이 안 돼지. 겅중겅중 뛰고 그러지 놀래지. 짐승이니까 우리보다 더 청각이 발달해가지고 더 그래. 더 예민해요.”
4. 매일 보따리 싸는 여자
도저히 적응할 수 없는 소음에 적응해야만 살 수 있었던 하루하루. 도저히 살 수 없어서 폭격장 철수를 요구하고 나서 봤지만 쉽사리 풀리지 않고 시간은 갔다. 한국 전쟁 끝에 어영부영 설치되어 버린 미군 전용 폭격훈련장. 억울한 지도 모르고 지내온 게 수십 년, 이러다가 모두 죽을 거 같아 살려달라 외친 게 또 십 수 년이었다.
“분명히 데모를 막 했는데 TV에 안 나오는 거야. 뉴스에 아예. 우리가 할 때 방송사들이 왔었거든. 다 찍어는 갔는데 다 막은 거지. 오늘은 나오겠구나 하고 9시 뉴스 보면 또 안 나와. 그냥 없는 마을 인 것처럼, 없는 일인 것처럼”
“2000년쯤 되어서야 이슈가 돼서 그때 조금씩 나오기 시작했는데… (사람들이) 세상에 저런 데가 어디에 있냐고, 저거 거짓말 아니냐고 그랬지."
서울에서 겨우 70킬로미터 떨어진 거리, 우리가 올림픽을 하고 아시안게임을 하고 대통령선거를 하고 월드컵을 하던 순간에도 이곳은 전쟁터였다. 우리가 기쁨으로 축포를 터트리고 화려한 불꽃놀이를 할 때도 매향리 마을 사람들은 54년간 멈추지 않는 전쟁이었다. 불꽃놀이만 조금 길어져도 시끄럽다고 민원이 생기고, 에어 쇼 행사준비만 며칠 해도 깜짝깜짝 놀라는 요즘. 17년간 소리소리 쳐서야 다른 마을 사람들 같이 조용한 하루를 살 수 있게 된, 매향리 마을이다.
“생각해 보세요. 54년동안 포탄이 떨어졌는데. 하루에 700개씩… 그게 갯벌에 다 가라앉아 있는데. 도대체 몇 개가 바다 속에 있는 거에요?"
“형님이 저보고 매일 보따리 싸는 여자 같다고 했어요, 당장이라도 집 나갈 사람 같이. (옆에서 “자기가 마음을 안 주니까, 매향리에(웃음)”) 그게 보였나 봐. 사격장이 폐쇄되면서 이제 살 만하겠다, 생각을 그때야 했어요. 폭격 소리가 안 들리잖아. 갑자기 조용해 지니까, 너무 좋은 거야. 알지 못했던 세상이죠. “
긴 시간 인터뷰에 응해 주신 김영애(1961년생, 58세, 1989년 결혼), 김미경(1964년생, 55세, 1991년 결혼), 강경숙(1961년생, 58세, 1983년 결혼) 님에게 감사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