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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피는 마을 매향리에 미군이
남기고 간 것

쿠니 사격장의 유래와 역사

by 화성평화지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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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60년도 더 된 이야기다. 그 시작부터 끝까지 제대로 기억하는 이들은 이제 남아 있지 않다. 보통 30년 정도가 한 세대를 의미한다고 하니 이미 2세대가 흘러 버린 옛날 이야기다. 이 마을에 미군이 폭격을 시작한 1951년에 태어난 아기가 어느 새 68세의 할아버지가 되어 버렸으니 말이다. 쿠니 사격장이 정식으로 건립된 1968년에 건장한 청년이던 이들은 이미 70, 80을 훌쩍 넘긴 고령이 되었고, 폭격 소리만 평생 듣다가 무덤에 묻힌 이들도 부지기수다. 그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 줄 수 있는 것들은 마을 주민들이 만든 역사관에 남은 물건 몇 가지와 마을 입구에 가득한 포탄 무더기뿐이다.


1. 한국의 땅 ‘고은리’가 미군의 땅 ‘쿠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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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다수 이들에게 이름조차 생소할 ‘쿠니 사격장’은 이 작은 마을에 1951년부터 2005년까지 54년 동안 있었던 미군 전용 폭격장의 이름이다. 매향리의 옛 지명이었던 ‘고은리’라는 한글이 낯선 미군들이 붙인 이름이었다는데, 우리에게는 이 이름이 되레 낯설다. 일본 오키나와, 필리핀 클라크, 태국, 괌 등지에서 날아 온 폭격기들이 끊임없이 포탄을 투하하던 장소가 우리나라 경기도 해안의 작은 마을에 있었다는 사실조차 알고 있는 이들이 많지 않다.


어부의 아들들은 대를 이어가며 배를 타고 그 딸들은 갯벌에서 조개를 캐던 평화로운 땅이었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미군들은 마을 앞 바다에 떠 있는 농섬에 폭격을 해대기 시작했다. 1952년에는 고온리 해변에 군용 막사를 치고, 1953년에는 전투기 격납고 모양의 함석으로 막사를 짓더니, 1954년부터는 미군이 해안지역에 주둔하기 시작했고, 1955년에는 공식적인 폭격훈련장이 설치되었다. 그때부터 하늘에서는 하루에도 수백 개씩 포탄이 떨어져 내렸다.


미군이 들어오면서 조상 대대로 일구던 땅 21만평이 징발되었고, 1963년부터는 벼를 키우고 작물이 익어가던 땅 모두가 폭격훈련장으로 바뀌었다. 마을에 사는 140여 가구의 생계가 달려 있던 논밭은 이제 눈 앞에 있어도 사용할 수가 없는 무용지물이 되었다. 1968년이 되자 육상 사격장을 만든다며 마을 한 가운데 있던 농토 29만평까지 추가로 수용되었다. 미군들은 ‘쿠니 사격장’라고 부르던 ‘고온리 사격장’이 그 모습을 갖춘 때다. 대한민국에 존재하던 한적하고 평범한 한 마을이, 미국의 태평양 미공군사령부 산하 제7공군 소속 미군 전용의 연습장이 되었다.


m100_4495.JPG 항아리 옆에 장승처럼 서 있는 포탄 껍질들, 한 개의 무게가 227Kg 짜리인 포탄들이 하루에도 수백 개씩 떨어졌다.

2. 마을 위로 날아오른 폭격기, 마을로 떨어지는 포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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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실뭉실한 언덕이 완만하게 이어지는 마을의 아늑한 풍경이 기나긴 저주로 바뀔 줄을 몰랐다. 높은 산이 없는 구릉지대인데다, 해상표적물과 지상표적물이 가까이에 있어서 해상훈련과 육상훈련을 동시에 할 수 있다며 미군들은 이곳을 최적의 훈련장소로 꼽았다. 안개 끼는 날 조차 거의 없어서 주말과 공휴일을 제외하고는 거의 매일같이 폭격기가 날아오를 수 있는 기상환경까지. 쿠니 사격장 주변 마을이 가지고 있던 자연환경은 미 공군에게는 축복이었고 마을 사람들에게는 저주의 시작이었다.


시뮬레이터나 이론으로만 훈련을 받다가 생전 처음으로 실제 폭격을 해보는 초보 조종사들을 훈련시키기에는 안성맞춤이라며 쿠니 사격장은 농섬을 중심으로 점점 확장되었다. 1980년에는 690만 평 규모의 해상사격장과 29만평 규모의 육상사격장을 갖춘, 무려 719만 평 규모의 폭격연습장으로 탄생한다. 당시 이 사격장을 묘사하던 말을 되새겨보면 참으로 잔인하다. “실제로 파괴가 가능한 표적을 갖춘, 실제로 포격을 할 수 있고, 실제 표적의 피해를 알 수 있는 아시아의 몇 안 되는 훈련장” “사람들이 멀쩡히 살아가는 마을이 바로 코앞이라 전쟁 상황을 더욱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는 연습장” 그 폭격기 아래에서 살던 마을 사람들은 대체 누구를 위해 54년 동안 전시 상황을 재현하고 있었던 걸까?


쌩쌩 전투기가 날아다니며 쿵쿵 폭탄을 떨어뜨리고 끝없이 총을 쏘아대는 사격장 옆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삶은 달라졌다. 폭탄의 파편이 인근까지 널리 퍼지고, 때로는 불발탄이나 오폭으로 인한 사고가 일어나는 곳. 갯벌에 나온 12살 소녀의 다리에 폭탄 파편이 박히고, 굴을 캐던 만삭의 임산부의 등 뒤에 포탄이 박히는 사건도 일어났다. 사격장 옆에서 살아가는 하루하루는 사격장의 표지판이라도 된 듯한 기분으로 견뎌내는 시간이었다.

rx10m4_0131.JPG MK-106 핵투하 연습포탄을 주워다 만든 등잔받침, 갯벌에서 일하던 만삭의 임산부 등에 꽂힌 포탄과 같은 종류다.

3. 끝이 없는 전쟁의 삶

rx1r2_1277.JPG 담배 재떨이로 사용한 조명탄의 뇌관부분

누가 걸릴 지 모르는 러시안룰렛처럼 죽음의 공포가 항상 가까이에 있었지만, 언제나 그렇듯 삶은 계속되어야 했다. 땅도 갯벌도 빼앗긴 마을 사람들에게 하루 세끼 쉬지 않고 찾아오는 배고픔은 더 처참한 고통이었다. 갯벌과 논밭으로 떨어지는 포탄은 무서웠지만 탄피는 주워 모으면 돈이 되었다. 물자가 귀하던 시절 알루미늄으로 만든 조명탄 탄피는 양동이로, 물받이로 변신했다. 조명탄을 쏘아 올리고 떨어진 낙하산 조각은 여인들의 속옷이 되고 이불호청이 되었다. 폭약을 제거한 불발탄은 땅땅 땅땅 마을의 급한 일을 알리는 종이 되었다. 전쟁의 도구들이 흔한 일상의 도구가 될 만큼, 마을 곳곳에는 전쟁이 깊숙이 자리잡았다.


한국전쟁 직후이니 당연하다 여기며 살다가, 미군이 이 나라를 지키려면 어쩔 수 없다 체념하다가, 세상에 없는 마을인 냥 잊혀졌다가, 더 이상은 이렇게 못 살겠다며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이 1988년. 하고픈 말 차마 다 못하고 살던 시절이었고, 하고픈 말 다 하면 온갖 색깔논리로 공격받던 시절이었다. 한국 역사상 최초로 주민들의 힘으로 미군사격장을 몰아낸 2005년까지 기나긴 싸움이었다. 그리고 이 마을에 54년의 전쟁을 가져왔던 미군들은 바다와 갯벌 속에 700억의 수거비용을 들여야 할 수많은 포탄 껍질 만을 남겨 놓았다.

rx10m4_0109.JPG 사격장 이후 삶의 흔적들을 한 곳에 모아 놓은 매향리 역사관 전시실
rx10m4_0123.JPG 야간 폭격 시 조명탄을 쏘아 올리고 떨어진 낙하산. 갯벌에 떨어진 낙하산을 주워다가 곡식자루나 이불호청, 모기장, 옷감으로 사용했다.
rx10m4_0141.JPG 마을을 날려버릴 만큼 파괴력이 큰 100파운드짜리 폭탄, 뇌관을 빼고 폭약을 제거한 다음 마을의 종으로 사용했다.
rx10m4_0124.JPG 조명탄 화약을 감싸고 있던 탄피는 우물에서 물을 길어 나르는 양동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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