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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성평화지킴이 Jan 31. 2019

내 땅이 더 이상 내 땅이 아니오

깃발이 올라가면 멈추고 깃발이 내려가면 움직인다. 철조망이 쳐진 부대 안에 황색 깃발이 올라가면 모든 것이 중지다. 천둥 같은 소리로 날아다니는 전폭기만 철조망 위를 오간다. 아차 때를 놓치면 한 해 농사를 망치기 십상이라 일 년 내내 절기를 지키며 사는 농부들도 이곳에서는 속수무책이다. 보들보들한 흙에 파종하기 좋은 날도, 바싹 마른 논에 물 대기 좋은 날도 속절없이 지나간다.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해야 황색 깃발이 내려간다. 마을 앞 바다에 포탄을 쏘아대던 전투기가 운행을 멈추는 시간이다. 깃발이 내려가기만 기다리던 농부들이 서둘러 논밭으로 향한다. 멀쩡한 대낮에 하지 못했던 일들을 해치우려면 꾸물거릴 시간이 없다. 전투기 소음 아래에서 숨죽이며 있던 마을 사람들이 그제서야 보이기 시작한다. 

 가래질을 하며 봄 농사를 준비하는 청명(淸明)도 씨 뿌리기를 하는 망종(芒種)도 놓치기 일쑤였다. 망종까지 보리를 모두 베어야 논에 벼를 심는데 그 농사 일정이 내 맘 대로가 아니었다. 곡우(穀雨)에 비가 오면 풍년이 든다는 선조들의 경험 어린 덕담보다는 올 한해 폭격 훈련이 얼마나 빽빽하게 이어질 지가 더 관건이었다. 씨라도 뿌리고 약이라도 제 때 치려면 24절기 대신 전몰장병 기념일이나 독립기념일 같은 미국의 국경일을 외워야 했다. 그 날은 미군 부대의 폭격훈련이 하루 종일 쉬는 날, 매향리 농부들이 모처럼 훤한 햇빛 속에서 일할 수 있는 날이었다. 같은 나라에서 같은 땅을 일구며 살았지만 너무나 다르게 흘러간 시간을 산 이 마을 농부들에 대한 이야기다. 


1.

그 시절 미군 부대에게 알토란 같은 땅을 빼앗긴 한 노인이 읍내에서 낡고 허름한 부동산을 지키고 있다. 마치 땅에 한이라도 맺힌 것처럼 땅을 사고 파는 데 관심이 많다. 그 시절 땅을 빼앗기지 않았다면 얼마였을까 하는 실없는 계산도 가끔은 해 본다. 미군 부대가 철수하고 난 후 내 땅을 다시 돌려받을 수 있지 않을까 잠시 헛된 희망도 가졌었다. 그저 내 땅에서 열심히 농사 지어 식구들 든든하게 먹고 입히면 된다 생각했는데, 그 꿈 하나를 평생 이룰 수가 없었다. 전쟁을 막고 평화를 지킨다는 명분은 작은 마을에 살던 농부의 소박한 삶을 바꾸어 놓았다. 내 땅을 내놓고는 철조망이 쳐진 '남의 땅'에서 한없이 불안한 소작인으로 살아야 했던 한 노인의 삶이 그렇게 저물고 있다. 


“우리 집 땅이 사격장이 있던 그 부지 안 쪽이에요. 철조망이 두렁 따라 쭉 쳐져 있던 그 바로 안쪽. 이제는 읍내에 나와서 지내지만, 그쪽(사격장)은 지금 봐도 기분이 썩… 뭐 생각하고도 싶지 않고. 가능한 그 쪽으로 지나와도 그 (땅)쪽은 안 보려고 하죠. 뭐 봐야 소용없으니까.”   


2. 

매향리는 농사 지을 땅도 있고 비싸게 팔리는 소금이 나는 염전도 있고 맛깔스런 굴이 주렁주렁 열리는 양식장도 있는 살기 좋은 마을이었다. 전쟁 중에 흘러 온 피난민들은 내내 힘든 삶의 연속이었겠지만, 이 마을 대대로 물려 받은 땅이 있는 토착민들은 어디 가서 섭섭한 소리할 필요 없는 풍족함이 있었다. 하지만 1968년 ‘쿠니 사격장’의 부지로 마을의 농경지가 징발 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처음에 들어왔을 때만 해도 마을의 땅은 안 건드린다고 했어요. 뻘(갯벌)에 나가서 일하는 건 막고 그랬지만, 농사 짓는 건 크게 문제가 없었지. 그러다가 육십 년 후반에 가서는 땅을 가져가겠다는 거야. 뭐 그때는 싫다, 안 된다, 이런 말 할 수 있는 그런 분위기도 아니고…”  


몇 대째 이어가며 농사짓고 있던 땅을 내 놓으라는 말을 들은 농부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당장 농토가 없어지는 것만 해도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데 땅 가격을 제대로 쳐 주는 것도 아니었다. 사격장 설립 과정에서 농경지를 징발하던 1968년 당시, 아무리 못 해도 평당 500~600원은 하던 농토를 150~200원 정도의 헐값으로 후려쳐 졌다.  


“그 때 가격은 말이 아니었지. 반값이 뭐야, 삼분의 일 사분의 일도 안 되는 가격으로 치는데. 내가 농토가 삼천 평이 넘었고 산이 지금 주차장 있는 쪽(옛 쿠니 사격장 부지)에 이천 평. 그때 평당 50원씩 받았어요. 그 때 논은 평당 220원, 쌀 서되 값이라고 했어. 대체 그게 전부 몇 평이야. 그 땅을 지금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 봐요. 그런 땅을 그냥 눈 뜨고 빼앗긴 거지."


3.

그렇게 내 땅이었고 우리의 땅이었던 마을 한 복판의 알짜배기 농토는 ‘남의 땅’이 되었다. 평생 농사를 짓는 것 말고는 다른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팔자를 바꿀 만큼 넉넉하게 토지 보상금을 받은 것도 아니었다. 어렸을 때부터 당연하게 농사 지으며 먹고 살 거라 생각했던 농부들, 내 땅을 잃은 농부들은 이제 소작농이 되었다. 내 집 없는 설움보다도 더 크다는 내 땅 없는 설움이 마을 사람들에게 닥쳤다. 


“먹고 사는 게 너무 힘드니까 훈련이 없는 시간이라도 들어가서 농사를 좀 지을 수 있게 해달라고 했죠. 그때 미군 부대에 있었던 사람하고 이렇게 다리를 놔 가지고. 다 들어갈 수 있었던 건 아니고 허가를 받은 사람만. 부대 앞을 지키는 경비원들이 있으니까, 허가를 받은 사람만 거기로 통과할 수가 있거든. 거기에서 농사를 지으려면 사용료를 내는 거지. “ 


사격장의 철조망 안으로 들어가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것만도 감지덕지였다. 내 땅이었지만 이제 그 땅에서 농사를 지으려면 사용료를 내야 했다. 계속 농사를 지을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불안정한 상태였다. 씨 뿌리고 물 주고 다 키워놔도 제대로 거둘 수 있을지 누구도 보장할 수 없었다. 내 땅에 세워진 미 공군 사격장의 철조망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마치 특별한 은혜라고 입는 냥 여겨질 지경. 징발 된 ‘내 땅’에서 소작을 하는 상황, 한국의 농부가 미군부대의 소작농이 되는 웃지 못할 상황이 매향리에서 펼쳐졌다. 


4.

사격장에서 농사를 짓고 산다는 건 어쩔 수 없이 생명의 위협을 받는 일이기도 했다. 탄피나 폭탄을 피할 수 있는 시간과 지역에 한해서 허용된 것이었지만 목숨 하나는 아슬아슬하게 내 놓고 일하는 상황. 하지만 배고픔은 두려움을 이겼다. 이 일을 놓치면 생계가 막막해 지는 마을 사람들은 미 공군의 훈련 일과를 외워가며, 미 전투기의 사격 경로를 외워가며 계속 농사를 지어 나갔다. 


이제 마을 사람들은 사격훈련 시작을 알리는 깃발만 보고 살았다. 미군 부대의 철조망 위에 황색 깃발이 올라가고 내려감에 따라 마을 사람들의 활동 반경이 달라졌다. 미 공군의 일과 마침을 알리는 황색 깃발 내림은 매향리 마을 사람들의 일과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다. 하루 종일 해도 모자랄 농사일을 그 짧은 시간에 하려니 서둘 수 밖에 없었다. 컴컴한 밤에도 경비원을 피해 일을 하고 철조망을 몰래 넘어서 들어가기도 했다


내 땅을 내놓은 농부들에게 더 억울하고 서러운 일도 생겨났다. 1988년부터 쿠니 사격장의 폐쇄를 요구하는 매향리 사람들의 투쟁이 시작되자, 마을에 주둔하는 미군과의 갈등이 생기고 미군의 통제도 심해졌다. 미군에 맞서는 이들에게 본보기를 보인다며 더 이상 농사를 짓지 못하게 막기도 했다. 세상에 밥그릇을 쥐고 흔드는 것만큼 치사하지만 강력한 무기도 없다. 언제나 밥그릇을 쥔 자의 유세는 잔인하기 마련이었고, 그 시절 매향리의 갑은 ‘내 땅’을 차지한 미 공군 사격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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